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국가안보실을 도·감청한 정황이 미 국방부 기밀문서 유출로 드러났다. 미국 국방부 청사 모습.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대통령실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국가안보실 도·감청 의혹과 관련해 거듭 ‘위조설’, ‘제3자 개입설’ 등을 주장하며 반박에 나서고 있지만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다. 국가 안보와 관련한 사안을 놓고 논란을 축소하는 데 급급해 자충수를 두는 게 아니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동맹국인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악의를 가지고 했다는 정황은 지금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의 발언을 놓고 12일 정치권에선 일제히 비판이 쏟아졌다. ‘악의적인 도청과 선의의 도청이 따로 있느냐’는 것이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확대간부회의에서 “선의면 동맹국 대상으로 불법 도청을 해도 된단 말이냐”며 “왜 도청당한 우리가 먼저 나서 미국과 의견이 일치한다며 감추기에 급급한가”라고 말했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도 <에스비에스>(SBS) 라디오 인터뷰에서 “도청은 도청이고 다 나쁜 일”이라며 “주권국가로서 미국이 도청을 했다고 하면 언론과 야당의 문제 제기를 지렛대로 삼아서 외교를 승화시키는 게 낫지, 무조건 아니라고 하면 되냐”고 비판했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도 중진연석회의에서 “미국이 도청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우리 대통령실도 그런 불법 도·감청지대에 있다는 게 합리적일 것”이라며 “사실관계나 진상 파악은 비공식적으로라도 끝까지 해야 한다”고 짚었다.
김태효 차장이 전날 “공개된 정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고 말한 데 이어 “이 문제는 많은 부분 제3자가 개입이 돼 있다”고 거듭 주장한 것 역시 의구심을 남긴다. 이미 미국 국방·정보 수장들이 유출 문서 대부분을 원본으로 인정했는데도, 납득할 만한 근거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일각에서 제기되는 ‘제3자 배후설’을 전면에 내세운 주장이어서다. 기밀문서 유출 뒤 미국에서는 러시아 등 미국에 적대적인 세력이 문서를 조작해 흘렸을 가능성이 두루 흘러나오고 있으나 확인된 사실은 없다.
특히 <뉴욕 타임스>가 공개한 안보실 관계자들의 대화 내용은 제3의 세력이 간여해 조작했다기엔 국내 상황과 맞아떨어진다는 평도 있다. 유출된 기밀문서에는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 등이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를 놓고 미국의 요구와 ‘살상무기 지원은 하지 않는다’는 정부 원칙 사이에서 고심하는 대화가 담겨있다. 군사전문가인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언론에 유포된 안보실 관계자의 주장은 하나도 왜곡된 것이 없는 진실로, 한국의 무기수출 법체계와 정책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발언들이고 실제 한국 정부의 검토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며 “심지어 포탄 지원을 하려면 누가 어떤 정책을 검토하는지 성명과 직위가 정확히 기재돼 있다”고 짚었다.
앞서 대통령실이 “용산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임을 명백히 밝힌다”고 입장을 낸 데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용산 대통령실’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도·감청이 이뤄졌거나, 휴민트(정보원)가 활용됐을 가능성이다. 대통령실이 “용산 대통령실은 청와대보다 더 안전하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관측에 힘을 더한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도청 가능성을 전면 부인하는 이 말이 사실이라면 사람이 흘렸다는 것이고, 우리 안보 핵심 관계자중에 미국에 정보를 떠넘기는 사람이 있단 것”이라며 “통신 도청을 당해도 심각한 상황인데 내부자 유출로 가면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윤건영 민주당 의원도 전날 <문화방송>(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백번 양보해서 용산 대통령실 주장처럼 도청만은 아니라고 한다면 남은 가능성은 휴민트 등 다른 경로를 통해서 첩보가 넘어갔을 가능성”이라며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실이 뚫렸다면 러시아나 중국, 북한의 스파이 활동을 우리가 잘 막고 있는지 두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엄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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