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4일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지난해 9월부터 야당이 밀어붙인 이 법안은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게 됐다. 더불어민주당은 우선 국회로 되돌아온 법안을 재표결하는 동시에, 향후 좀 더 전향적인 내용을 담은 법안을 다시 발의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민주당이 대통령 거부권에도 관련 법안 처리를 강행하려는 배경에는 여론 지형이 불리하지 않다는 정치적 판단이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뉴스토마토>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미디어토마토에 의뢰해 지난달 27~29일 전국 성인 106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0%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를 보면, 응답자의 55.2%는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법안 처리 과정에서 대통령의 독선·불통 이미지와 대통령에 종속된 여당의 모습을 부각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한겨레>에 “대통령이 재의를 요구했으니 국회는 재표결하겠다”며 “표결 과정에서 대통령의 독선적인 국정 운영과 국회 무시는 물론 국민의힘이 대통령의 하수인 노릇에 충실한 모습까지 국민들 앞에 다 보이고, 이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해당 법안이 다시 본회의 문턱을 넘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거부권을 규정한 헌법 53조를 보면, 재적의원 과반이 출석하고 출석의원 3분의 2(200석) 이상이 동의해야 재의 요구된 법안을 재의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소속을 포함한 야권 의석을 모두 끌어모아도 180석에 그친다.
이에 따라 민주당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들은 ‘재입법’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 민주당은 애초 △수요 대비 초과생산량이 3%를 넘길 경우 △쌀값이 전년 동기 대비 5% 이상 내려갈 경우 정부가 쌀을 의무매입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내놨다가 김진표 국회의장의 중재 과정에서 의무매입 기준을 △초과생산량 3~5% △쌀값 하락치 5~8%로 완화했는데, 정부·여당의 협상 의지가 없는 만큼 원안에 추가적인 쌀 산업 지원책을 담아 재발의하겠다는 것이다.
야당이 이처럼 양곡관리법 처리에 ‘다걸기’(올인)하는 것은 농지가 많은 당내 호남지역 의원들이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농해수위 소속 민주당 한 의원은 “거부권 행사로 정부 책임은 상당히 무거워질 것”이라며 “벼 이외 다른 작물 재배 사업 예산이 내년도 예산안에 많이 담기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엄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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