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2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미쓰비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4돌 기자회견에서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가 발언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윤석열 정부가 6일 발표하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법’의 뼈대는 △‘제3자에 의한 병존적 채무 인수’ 방안과 △한·일 재계 단체인 전경련-게이단렌(경단련)의 ‘미래청년기금’(가칭) 조성 등이다.
여기엔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직접적 사과도, 전범기업의 사죄와 배상도 담기지 않는다. 미쓰비시 등 일본 전범기업의 “손해배상(위자료) 책임”을 인정한 대한민국 대법원의 최종 확정 판결(2018년 10월30일·11월29일)과 접점이 전혀 없다. 한국 대법원 판결을 “국제법 위반”이라며 완강히 거부해온 일본 정부의 ‘완승’이다.
이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계승하겠다”고 공언한 윤 대통령의 지난해 8·15 광복절 경축사에 비춰도 크게 후퇴한 ‘자기부정적 해법’이다. 1998년 10월8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도쿄에서 공동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양대 축은 “과거 직시”와 “미래 지향”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이번 해법에서 “미래 지향”을 빌미로 “과거 직시”라는 절대 과제를 내팽개친 모습이다.
정부의 발표에 이어 일본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과거 담화를 계승한다’는 말로 과거사에 대한 반성·사과를 표시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침략전쟁에 대한 포괄적 반성이지 직접적으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일본 역대 정권마다 ‘담화 계승’ 뜻을 밝혀왔기에, 이번 문제를 위한 추가적 조처로 보기도 힘들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 1월12일 처음 공론화한 ‘제3자 병존적 채무 인수’ 방안이란, 대법원의 확정판결에 따라 배상 책임을 진 일본 가해 전범기업의 ‘채무’를 제3자인 한국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인수해 포스코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수혜 한국 기업을 상대로 기부금을 걷어 피해자한테 나눠주는 방식이다. 가해자는 뒷짐을 지고 있어도 되는 기이한 해법이다.
‘미래청년기금’은 전경련과 게이단렌이 함께 기금을 조성해 한국 유학생 등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의 사업을 벌이겠다는 방안이다. 하지만 이는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는 별개 사안이다. 여론의 역풍을 의식한 “물타기”라거나 “분식(화장)”(강제동원 피해 소송 대리인단 임재성 변호사)이라는 비판이 쏟아지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윤석열 정부의 해법은 ‘미래 지향의 한·일관계를 열겠다’는 수사만으론 덮을 수 없는, 정권 차원을 넘어서는 근본적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국제 인권법의 대원칙인 ‘피해자 중심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피해자가 중심에 서지 않은 ‘외교적 봉합’은 더 깊은 수렁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점은 2015년 12월28일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일본 정부의 이른바 ‘위안부 합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일 관계에 오래 관여해온 한 원로 인사는 “윤석열 정부가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든 모양새”라며 “‘위안부 합의’ 때보다 더 심각한 갈등이 일 수 있다”고 짚었다.
둘째, 일본 전범기업의 참여가 없는 ‘제3자 병존적 채무 인수’ 방안은 미쓰비시 등의 “국제법 위반과 불법 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대한민국 법원의 국제 재판 관할권”을 전제로 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만으로는 “대한민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최고 헌법 해석 기관의 판단이다. 윤석열 정부의 해법은 “불법적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구제”를 시도한 이같은 대법원 판결의 근본 정신을 외면한다.
셋째, 이런 사정 탓에 윤석열 정부의 해법은 일본 식민지배가 “합법”이라는 일본과 “불법”이라는 대한민국의 오랜 이견과 관련해 사실상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준 외교·행정 행위로 해석·악용될 위험이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전문에 명시하고 있고, 2018년 대법원 판결은 “대한민국 헌법 규정에 비추어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적인 강점(强占)”이라는 헌법 해석을 전제로 한다.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병존적 채무 인수’ 방안을 두고 남기정 서울대 교수 등 많은 한일관계 전문가들이 “식민지배가 합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이 이를 유리하게 해석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우려하는 까닭이다.
더구나 윤석열 정부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정부의 합의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가 해소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국에서 대법원 판결을 받은 피해자(4건 15명)는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인정한 강제동원 피해자(21만8639명)의 0.0069%에 불과하다. 이미 법원에 계류 중인 소송만 66건에 1124명이다. 대법원이 2018년 판결을 번복하지 않는 한 대부분 승소 가능성이 높은 소송들이다. 윤석열 정부의 일방적 ‘해결’ 선언으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도쿄/김소연 특파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