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27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국회를 통과한 삼성비자금특검법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백기철 ㅣ 편집인
“내년 총선부터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여야가 합의해 선거법을 개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저의 제안이 총선에서 현실화하면 저는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 또는 정치연합에게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3년 4월 첫 국회 시정연설 발언이다. 2004년 총선에서 정치권이 선거법을 고쳐 지역 독점 구도를 허물면 과반 정당에 내각을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치권이나 국민 반응은 싸늘했다. 무슨 꼼수가 있는 건 아닌지, 어떻게 지킨 정권인데 내각을 내놓겠다는 건지 의아해했다.
돌이켜 보면 노무현의 이 말은 여태껏 우리가 붙들고 있는 선거개혁, 정치개혁의 고갱이에 가깝다. 노무현 특유의 단순 어법이지만 현행 소선거구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연합정치를 통해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심모원려가 담겨 있다. 노무현은 재임 중 “새 시대의 첫차가 되고 싶지만 구시대의 막내가 될 것 같다”고 했지만 선거개혁에 관한 한 그가 첫차였던 셈이다.
문제는 20년 세월이 지나도록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2019년 우여곡절 끝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됐지만 개정 과정의 여야 격돌, 위성정당 돌출 등으로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됐다. 노무현 이후 20년, 멀리 1노3김의 1987년 체제 이후 35년 동안 지역 구도, 승자 독식, 대결 정치의 쳇바퀴 속에 우리는 갇혀 있다.
더욱 걱정스러운 건 이를 극복할 동력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과장된 비유지만 마치 북한이 김씨 일가를 정점으로 한 일당독재 체제에 갇혀 옴짝달짝 못 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야 정치인들은 대결 정치 속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각각 수구꼴통, 친북좌파 척결을 사명으로 내세우며 다양성·합리성에 바탕한 공존의 정치를 철없고 순진하다고 일축한다.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다. 촛불과 태극기로 상징되는 지지자들 역시 이른바 ‘악당 정치’에 골몰한다. 적폐청산으로 대표되는 2016년 촛불에서 정치개혁은 후순위였다. 비정상적 권력을 끌어내고 책임자들을 단죄하는 데 집중했다. 이 와중에 온건 보수까지 포괄하는 ‘촛불동맹’은 흐트러졌고 정치개혁의 동력도 희미해졌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쟁취, 1990년 김대중의 단식을 통한 지방자치제 도입은 시민의 열성적인 참여, 정치인의 헌신이 이뤄낸 선거개혁의 모범 사례다. 비록 뒤틀렸지만 2019년 선거법 개정만 해도 당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의 단식이 있었고, 더불어민주당 안에서 비례대표에서 일정 부분 거대 정당의 양보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대표성이 강화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건 긍정적이다. 이 발언이 어떤 정치철학에서 비롯됐는지 불분명하지만 윤 대통령이 노무현 이후 오랜 과제인 선거개혁의 동력을 만드는 데 일조하기를 기대한다.
최근 김진표 국회의장과 국회 정치개혁특위, 정치개혁 관련 여야 모임들이 활동 폭을 넓히는 것도 주목된다. 지난 연말 국회 정개특위 위원들이 선거제 공부를 위해 몇몇 유럽 나라를 찾은 걸 두고 예산 정국에서 한가하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짧은 생각이다. 민생은 민생대로, 정치개혁은 정치개혁대로 투트랙으로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도개혁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올해야말로 선거제 개혁의 적기다. 큰 선거가 없고, 집권 여당과 제1야당이 권력을 분점하고 있어 어느 한쪽이 밀어붙일 수 없다.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든, 소선거구제 아래서 권역별 또는 연동형 비례를 확대하든, 또 다른 제3의 안이든 모두 성안해 국민적 공론화에 부쳐야 한다. 최선은 없지만 차선, 차차선은 있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책임 있는 정치인들의 헌신과 결단이다. 내년 총선은 누가 기득권을 벗어던지느냐가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 국민의힘 영남 중진, 더불어민주당의 수도권 586 정치인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특히 민주당 586 정치인들의 자기희생적 결단을 기대한다. 진보가 울림이 있는 건 이타적 희생에 바탕할 때다.
시민사회 역시 침묵하는 다수의 합리적 유권자를 대변하기 위해 결연히 나서야 한다. 지난 대선을 전후해 제왕적 대통령제로 대표되는 현행 정치제도 전반에 대한 회의가 국민들 사이에 크게 늘고 있다. 시민의 참여야말로 선거개혁, 정치개혁의 핵심 동력이다. 시민이 나서야 정치가 바뀐다.
새해엔 30년 넘게 지속돼온 대결 정치, 지역 정치를 극복하는 첫걸음을 뗄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23년을 선거개혁, 정치개혁의 원년으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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