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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로텐더홀에 스티로폼 매트리스와 녹색 담요가 도착했다

등록 2019-04-24 09:26수정 2019-04-24 10:14

정치BAR_김미나의 정치적 참견시점_ 한국당의 로텐더홀 사용기

23일 여야4당 ‘패스트트랙’ 합의 추인 뒤
세 차례 의원총회·청와대 기자회견
로텐더홀에선 25일까지 밤샘 농성
지난 1월엔 ‘5시간30분’ 단식도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23일 밤 국회 로텐더홀에 스티로폼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청하고 있다. 김미나 기자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23일 밤 국회 로텐더홀에 스티로폼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청하고 있다. 김미나 기자

23일 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이 선거제 개편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 대상 안건 지정) 합의안에 추인하면서, ‘꽉 막혔던’ 20대 국회가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날 가장 바삐 움직였던 의원들은 패스트트랙의 합의안을 완성해낸 여야 4당 지도부도, 의원총회를 열어 장장 4시간여에 달하는 치열한 마라톤 회의를 하고 합의안을 추인한 바른미래당 소속 의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간 선거제 개혁안, 공수처법안 등을 놓고 합의를 전면 ‘거부’했다가 4당의 패스트트랙 추인 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자유한국당 의원들이었죠.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4당의 패스트트랙 추인 의총을 지켜보면서 이날 온종일 재빠르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습니다. 오전 9시 국회 본청 2층에서 한국당 상임위 간사단 회의가 시작된 뒤 오전 1회·오후 1회의 의총, 청와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심야에 열린 긴급 비상의총과 밤샘 농성까지…. 장장 14시간 동안 ‘패스트트랙 저지’를 외치며 움직였습니다. 밤 11시께,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된 국회 로텐더홀에 스티로폼 매트리스를 깔고 몸을 누이며 ‘긴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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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 푼 황교안, 운동화 신은 나경원

오후 9시, 항상 단정한 정장에 넥타이 맨 모습만 보여주던 의원들이 하나둘 넥타이를 푼 채 로텐더홀에 등장했습니다. 로텐더홀은 국회 돔 지붕 아래 마련된 커다란 홀입니다. 로텐더홀을 사이에 두고 본회의장과 예결위 회의장이 마주 보고 있습니다. 국회에 견학을 오는 시민들, 해외에서 방문하는 인사들, 회의장을 오가는 국회 소속 직원과 의원들 모두가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지나는 곳 일 겁니다.

이날 의원들은 만반의 준비라도 한 듯했습니다. 등산복 차림 혹은 얇은 패딩을 껴입고 온 의원도 눈에 띄었습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바닥에 앉아 구호를 외치고 손팻말을 들었습니다.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은 현재 114명인데 이날 긴급 심야 의총에 100명이 참석했습니다. 선거법 등 꾸러미 법안의 패스트트랙 지정을 앞두고 당내에 퍼진 위기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위아래 맞춤 정장에 굽있는 구두를 신던 나경원 원내대표도 이날은 회색 운동화를 신고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나 원내대표의 목소리가 로텐더홀에 비장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23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긴급 비상의원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미나 기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23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긴급 비상의원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미나 기자

“이 자리에 서서 끝까지 한번 막아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들께서 저희와 힘을, 마음을 같이 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저희의 걸음, 뚜벅뚜벅 그 걸음마다 국민과 함께할 것입니다.”

황교안 대표, 정치개혁특별위원회 한국당 간사 장제원 의원, 사법개혁특별위원회 한국당 간사 윤한홍 의원이 이어 정부와 여당, 그리고 패스트트랙 지정에 합의한 다른 당들을 향해 규탄의 메시지를 냈습니다. 정부의 경제·대북 정책에 대한 비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여 이어지던 긴급 의총 뒤 로텐더홀에 스티로폼 매트리스와 초록색 담요가 도착했습니다. 당직자들이 스티로폼 매트리스를 깔고 초록색 테이프로 서로서로 이어붙이니 그럴듯한 대형 숙소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스티로폼 위에 돗자리를 깔았습니다. 의원 1인에게 초록색 담요 한장, 작은 생수 한 병씩 주어졌습니다. 의원들은 바닥에 등을 붙이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여 4야인 줄 알았는데 4여 1야였다”, “이런 민주주의 의회가 어디에 있나, 막가는 판” 등 종일 거센 발언을 쏟아낸 황 대표도 가벼운 차림으로 의원들 사이를 오갔습니다. 한 명 한 명 악수하고 강력한 투쟁을 이어가자고 독려했습니다. 매트리스 한편에선 작은 ‘법조인 모임’도 열렸습니다. 검사 출신 법무부 장관을 지낸 황 대표와 판사 출신 나 원내대표, 검사 출신으로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김재원 의원, 서울 중앙지검장을 지낸 최교일 의원, 검사 출신 김도읍 의원 등이 모여앉아 한참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목격됐습니다.

황교안 대표: “법률지원단 활동을 잘 되고 있나요. 너무 열심히 해서 살이 빠진 것 같아요.”

나경원 원내대표: “고발장 쓰라고 말씀드리면 바로 며칠 안에 나와요.”

최교일 의원: “이제 정점식 의원이 왔으니까 정 의원한테 맡겨야지요. 허허.”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23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미나 기자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23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미나 기자

자유한국당 여성 의원들이 23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철야농성을 하고 있다. 김미나 기자
자유한국당 여성 의원들이 23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철야농성을 하고 있다. 김미나 기자

여성 의원들은 로텐더홀 구석자리에 따로 자리를 펴고 앉아 카메라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매일 깔끔하게 세팅된 머리, ‘풀 메이크업’ 상태로 봤던 모습보다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국회 관리국은 오후 11시30분께 소등했습니다. 보좌진들은 국회 본청 바닥에 누워있는 의원들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한 듯 보였습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지난달 29일 오후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지난달 29일 오후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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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텐더홀에 쓰인 20대 국회 장면들

국회의원들이 로텐더홀 바닥에 앉아 연좌 농성을 벌이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은 아닙니다. 지난해 12월 이들 보다 먼저 ‘선거제도 개혁’을 이유로 로텐더홀에서 열흘간 단식 투쟁을 벌였던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있습니다. 그땐 “개혁을 해야 한다”고, 지금은 “하면 안 된다”고 외치는 점이 다릅니다. 손학규·이정미 대표의 로텐더홀 단식 투쟁이 풀린 계기가 자유한국당도 서명한 ‘선거제도 개혁 여야 5개당 합의문’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그 처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5당은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합의한다. 1.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 4항엔 1월 임시국회 안에 합의 처리한다고도 적혀 있었습니다. 늦어도 한참 늦은, 아직은 지켜지지 못한 약속입니다.

한국당 의원들은 지난달 29일에도 정경두 국방부 장관 해임, 문재인 정부 2기 내각 지명 철회 등을 요구하면서 로텐더홀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한 시간 만에 해산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1월 한국당이 로텐더홀 계단 아래에서 벌인 ‘5시간30분짜리’ 릴레이 단식 투쟁도 떠오릅니다. 한국당은 당시 청와대의 조해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임명을 이유로 ‘국회 보이콧’과 농성을 진행했습니다. 로텐더홀 계단 아래에 자그마한 ‘단식 부스’를 만들었지만, 참여 의원은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5시간30분씩 이어지는 단식 투쟁에 여론은 “웰빙 단식” “간헐적 단식” “딜레이 단식”이라는 비아냥 섞인 반응을 내놨습니다. 급기야 한국당 지도부는 ‘릴레이 단식’에서 ‘단식’이란 단어 대신 ‘농성’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단식 투쟁을 조용히 마무리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직까진 한국당의 패스트트랙 저지 투쟁의 방법으로, 단식 투쟁이 거론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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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트랙 저지 수단 고민하는 한국당…27일 두번째 장외투쟁 예고

지금 한국당 지도부의 최대 고민은 마땅한 ‘패스트트랙’ 저지 수단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의원직 총사퇴’ 카드는 수차례 공수표를 날린 적이 있는 데다 현실화 가능성도 크지 않습니다. ‘정치 쇼’라는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처럼 ‘육탄전’을 보게 되는 일도 없을 듯합니다. 이른바 ‘국회 선진화법’ 덕분입니다. 국회법 166조(국회 회의 방해죄)를 보면 “국회 회의를 방해할 목적으로 회의장이나 그 부근에서 폭행, 체포·감금, 협박, 주거침입·퇴거불응, 재물손괴의 폭력 행위를 하거나 이러한 행위로 의원의 회의장 출입 또는 공무 집행을 방해한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에 벌금에 처한다”고 적시 돼 있습니다. 정개특위·사개특위 회의를 막으면 중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선택권을 쥐고 있는 다른당 사개특위·정개특위 의원들의 마음을 구슬리는 방법 뿐일 겁니다.

한국당은 일단 25일까지 로텐더홀 연좌 농성을 벌이는 한편, 대국민 선전전을 통해 정부·여당의 실정과 여야 4당의 “야합”을 고발하는데 당력을 집중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또 지난 20일에 이어, 오는 27일 다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 소속 의원 전원과 당원, 지지자들이 모여 ‘문재인 올 스톱(ALL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집회를 열고, 거리 행진을 벌일 계획입니다. 우리는 다시 로텐더홀에 담요가 펼쳐지는 모습을 보게 될까요? 또 하나의 역사가 로텐더홀 위에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지난 1월25일 국회 본관 입구에서 조해주 선관위원 후보자 임명강행에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의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지난 1월25일 국회 본관 입구에서 조해주 선관위원 후보자 임명강행에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의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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