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BAR_국회 ‘숨은 권력자’ 전문위원의 세계
지난해 <한국방송>(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어셈블리’는 시시콜콜한 국회 사정을 리얼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드라마 속의 이런 대사가 귀에 들어왔다. “국회의 진짜 힘은 전문위원들이 갖고 있어요.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그들의 마음을 사야 합니다. 숨은 권력자들이죠.”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정말 그렇게 센가. 드라마용으로 조금 과장한 게 아닐까.’ 상임위 전문위원 검토보고서…“100개중 70~80개는 보고서 의견대로”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법률로 제정되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1단계 법안 발의, 2단계 상임위원회 법안 상정, 3단계 상임위 법안심사소위원회 심사, 4단계 상임위 의결, 5단계 법제사법위원회 의결, 6단계 본회의 통과다. 1·2단계까지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3~5단계다. 특히 3단계인 상임위 법안소위가 중요하다. 법안에 대해 진지하고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는 첫 관문이기 때문이다. 이때 전문위원들이 등장한다. 국회법은 안건을 심사할 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듣고’ 시작하라고 규정하고 있다.(제58조) 이 조항 때문에 각 상임위에 배속돼 있는 수석전문위원(1명)과 전문위원(1~3명)은 위원회에 상정되는 모든 법안을 미리 검토한 뒤 보고서를 작성해 상정 48시간 전에 의원들에게 배포한다. 의원들은 전문위원의 의견이 담긴 보고서를 먼저 본 뒤 법안을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세부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 보고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문위원을 보좌하는 입법조사관 ㄱ씨는 “의원들이 모든 법안에 관심 가질 수는 없다. 정치적으로 이해관계가 있거나 지역구 관심 법안이 아니라면 세부 내용은 잘 모른다. 그런 경우 검토보고서 내용을 많이 참고한다”고 말했다. 입법조사관 ㄴ씨도 “상정되는 법안 100개 중 70~80개는 크게 이슈가 안 되는 것들이다. 이런 건 대부분 우리가 낸 의견대로 간다”고 설명했다.
부탁과 항의 엇갈리고…보고서 내용에 민감해 여야 힘겨루기도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법안을 발의한 의원도, 이해관계자도 모두 검토보고서 내용에 민감해진다. 최근 한 재선 의원은 법안을 발의한 뒤 담당 상임위 입법조사관을 의원회관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법안 내용을 미리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서다. 겉만 보면 ‘내 방으로 오라’지만, 속을 보면 의원이 머리를 조아리고 ‘부탁하는 자리’인 셈이다. 한 입법조사관은 “의원이 직접 부르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부르면 안 갈 수 없다. 보고서를 쓸 때 부담이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토보고서에 등장하는 표현 때문에 상임위가 파행을 겪기도 한다. 지난해 4월20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뉴스테이법’(임대주택법 전부개정안)에 대한 검토보고서 때문에 중단됐다. 법안을 발의한 김성태 새누리당 의원이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나눠준 요약보고 문건과 전문위원이 보고한 내용은 천편일률적으로 부정적 의견만 전부 얘기를 했다. 수석전문위원이 객관적이지 못하다. 우리 위원회가 위원장님과 야당의 목소리가 큰 위원회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수석전문위원, 누가 이렇게 쓰라고 시켰나.” “이렇게 인쇄화되고 유인물화되면 결정적인 효과가 있다. 전문위원이 기본적인 바탕이 좀 부족하다. 전문위원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된다.”(이노근 새누리당 의원) 여야 의원 간 고성이 오갔고 국토위 수석전문위원은 결국 “보시는 분에 따라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나하나의 워딩에 더 고려를 했어야 되는데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검토보고서를 둘러싼 이런 식의 힘겨루기는 국회의 일상이다. 이 때문에 전문위원들은 가능하면 기계적 균형을 맞추려고 애쓴다. 찬반 쟁점들만 나열하는 식이다. ‘~을 고려해 입법정책적으로 검토하시기 바랍니다’라는 표현이 전형적인 방식이다. ㄱ 입법조사관은 “대체로 정책적 사안은 가급적 판단을 내리고, 여야가 정치적으로 갈리는 사안은 여러 의견을 충실히 수집해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고 말했다. ㄹ 입법조사관도 “검토보고서는 쟁점들을 정리해주는 것이다.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 결론은 의원들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5년 7월 국회법 개정 당시 “위원회에 두는 전문위원과 공무원은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추가되기도 했다.
“신중히 살펴봐주세요” 상임위원장 말 한 마디의 무게 ‘봉변’을 피하기 위해 전문위원들은 기계적 균형에 목을 매지만 상임위원장의 영향력만큼은 피하기 쉽지 않다. 특히 위원장이 직접 발의한 법안의 경우 이런 부담은 더욱 커진다. 국회 각 상임위에는 수석전문위원(차관보급)을 필두로 전문위원(2급), 입법심의관(3급), 입법조사관(3~5급) 등의 조사관 그룹이 있다. 이들의 수장은 각 상임위의 위원장이다. 어느 정당 소속 의원이 상임위원장이 되느냐에 따라 검토보고서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구조다.(김성태 의원이 야당 의원이 위원장인 국토위의 검토보고서를 문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위원장이 검토보고서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신중히 살펴봐주세요”가 대표적이다. ㄴ 입법조사관은 “전적으로 수석전문위원의 성향에 달려 있다. 심기를 살피는 수석이 있는 방이라면 위원장의 영향을 받는다. 위원장들이 100건 중 5건 정도는 원하는 방향을 얘기한다. 특히 자기 지역구 관련 법안은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ㄷ 입법조사관은 “위원장 발의 법안에 대해 반대 의견을 쓸 때는 미리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한 전문위원은 “위원장이 발의한 법안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냈다가 ‘섭섭하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각 당이 알짜 상임위의 위원장직을 가져가려고 줄다리기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법사위는 다른 상임위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평가도 있다. 2013년 1월 당시 법사위원장이던 박영선 의원은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18대 국회 때 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실이 그의 출입국 기록을 조회하는 등 정치사찰을 벌인 의혹이 있었다. 박 의원은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하게 하겠다’며 ‘개인의 출입국 기록을 정부 기관이 조회할 때 당사자에게 서면으로 통지’하는 내용을 개정안에 담았다. 하지만 당시 법사위 전문위원은 “수사기관에 출입국 기록을 제공한 경우에 있어서는 형사정책적 측면(피의자의 도피 우려)과 국가기관 간 정보 공유 및 국제사법공조의 효율성 측면에서 달리 볼 필요가 있다”며 비판적인 검토 의견을 냈다. 이 법안은 결국 폐기됐다. 법사위 근무 경험이 있는 ㄷ 입법조사관은 “법사위는 법리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면 의원들이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다. 다른 상임위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요즘 뜨는 로비 대상…대형 로펌은 ‘입법 컨설팅’ 서비스 한쪽 편을 들든, 기계적 균형을 맞추든 이해당사자 입장에선 검토보고서 문구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다. 이 때문에 전문위원과 입법조사관 등을 상대로 한 로비도 활발하다. 한 입법조사관은 지난해 한 기업 규제와 관련된 법안을 검토하던 중 로펌에 가 있는 퇴직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기업 쪽 입장을 설명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결론에 영향받은 건 아니지만 퇴직 선배이다 보니 문구에 신경이 쓰였다”고 말했다. 김앤장, 태평양, 화우 등 대형 로펌은 물론 대형 회계법인도 차관급 이상 전직 입법부 공무원을 활용해 기업들에 ‘입법 컨설팅’이라는 이름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1976년 시작된 입법고시 출신 고위공무원들이 퇴직을 시작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활성화된 건 아니다. 한 조사관은 “입법고시 출신을 활용해 직접 상임위에 로비하는 행태는 5~6년 정도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각 상임위 수석전문위원 대부분은 입법고시 9~10기다. 국회를 상대로 대관 업무를 하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아무리 양쪽 주장을 다 담는다고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라며 “하지만 아직까지도 왜 입법조사관들까지 만나 설명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직원들이 많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로비 대상”이라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on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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