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선고 공판이 끝난 뒤 이용수 할머니가 법원을 떠나며 입장을 밝히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는 이날 고 곽예남·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등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연합뉴스
“붙잡고 안 놔줘, 붙잡고 안 놔줘요. 이놈의 새끼가, 일본 놈의 새끼가, 군인 놈의 새끼가,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죽기 전에, 내 눈 감기 생전에 한번 분풀이, 꼭 말로라도 분풀이 하고 싶어요.”
30년 전인 1991년 8월14일,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처음 실명 고발한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첫 외침이 나왔을 때 한국 사회는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수치심을 느꼈다. 이후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명예를 회복하며, 일본 정부로부터 올바른 사죄를 받아내는 일은 한국 사회가 반드시 달성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됐다. 처음엔 여성들이 “업자들에게 속아 간 것”이라는 불성실한 답변에 머물던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4일 위안부에 대한 군의 관여와 동원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내놓게 된다.
한-일 간의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65년 체제의 벽은 굳고 높았다. 일본 정부는 1995년 7월 ‘아시아 여성기금’을 만들어 이 문제에 해결을 꾀하지만, 65년 체제 탓에 정부 예산은 투입할 수 없다고 버텼다. 위안부 문제가 국가 범죄임을 인정하고 ‘법적 책임’을 받아들이는 대신,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는데 그친 것이다. 한국 사회는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아시아 여성기금을 거부하고 기약 없는 대일 투쟁에 나섰다.
상황이 바뀐 것은 위안부 문제는 “65년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2005년 8월 정부 견해가 나오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왜 정부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는가! 한국 사회의 절박한 물음에 2011년 8월 헌법재판소가 화답했다. 일본 정부와 교섭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뻔뻔한 부작위’가 위헌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후 위안부 문제는 한국 정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외교 과제로’ 역사의 전면에 재부상했다.
2013년부터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정권 사이의 처절한 위안부 외교가 시작됐다. 하지만, ‘중국의 부상’에 한-미-일이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미국의 압력에 밀려 2015년 말 12·28 합의를 삼키고 만다. 이 합의를 통해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자신이 인정하는 것이 ‘법적 책임’인지 ‘도의적 책임’인지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책임을 통감한다’고 선언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그동안 꾸준히 거부해 왔던 10억엔(약 108억원)의 정부 예산 지출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한국 정부가 약속한 것은 이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었다. 2016년 말 촛불 집회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서도 2018년 1월 ‘재협상’을 요구하진 않겠다고 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위안부 문제는 한-일 정부가 ‘해결해야 할’ 현안이 아닌 ‘관리해야 할’ 현안으로 지위가 격하됐다.
이후 2021년 1월8일 모두의 예상을 뒤집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원이 국제 관습법상의 주권면제(국가면제) 원칙을 깨고,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1차 판결)한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 판결에 대해 “조금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고, 법원은 지난달 말 승소한 원고들이 일본 정부 자산을 강제집행할 길을 막았다.
이어 법원은 21일 2차 판결에서 원고들의 소청을 각하했다. 법원은 1차 판결이 위안부와 같은 ‘반인권적 불법행위’엔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한 주권면제 원칙을 받아들이며, “이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대체적인 권리 구제수단’”인 12·28합의가 존재한다고 밝혔다. 위안부 문제의 최종 해법으로 12·28 합의를 인정한 것이다. 항고 절차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피해자들이 법적으로 구제받을 가능성이 일단 크게 줄어들었다. 위안부 30년 투쟁사에 중대한 분기점이 된 것이다.
이 판결은 한-일 관계 개선의 흐름으로 이끌진 못할 것으로 보인다. 두 나라는 여전히 북한과 중국에 대한 ‘전략적 견해차’라는 근본적 문제를 안고 있으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 등 해묵은 난제와 오염수 방류 새로운 악재로 시름하고 있다.
이에 한-일 양국 정부는 판결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삼간 채 원론적 입장만 밝혔다. 외교부는 “오늘 판결 관련 상세 내용을 파악중인 바 관련 구체 언급은 자제코자 한다”면서 “우리 정부는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에 따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기 위하여 정부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일본을 향해선 “위안부 문제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전시 여성의 인권유린이자 보편적 인권 침해의 문제로서, 일본 정부가 1993년 고노담화 및 2015년 12·28 합의 등에서 스스로 표명했던 책임 통감과 사죄, 반성의 정신에 부합하는 행보를 보일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의 반응은 냉담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오전 정례 기자회견에서 “내용을 자세히 조사하고 있다. 현 시점에서 언급은 삼가겠다”고만 말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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