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용 외교부 장관(오른쪽)이 17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 외교장관 회담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방한 첫날인 17일 열린 한·미의 첫 대면 외교장관 회담에서 중국과 북한을 겨냥한 발언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위였다. 중국을 향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앞으로 비핵화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신뢰를 쌓아야 할 북한을 ‘권위주의 정권’으로 규정하면서 “국민들에 대한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학대를 자행하고 있다”고 작심 비판을 쏟아낸 것이다.
지난 1월 들어선 조 바이든 행정부가 앞으로 추진할 대외 정책의 기조를 ‘동맹과 힘을 합쳐 중국에 대항한다’로 잡은 만큼 미국이 한·미·일 3각 동맹을 강화해 중국 견제에 나설 것이란 건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상견례를 겸한 첫 외교장관 회담이자, 기자들에게 내용이 그대로 공개되는 머리발언에서 날 선 발언을 내놓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해석된다. 바이든 대통령이 현재 국제 정세를 권위주의와 민주주의가 충돌하는 ‘세계사적 변곡점’(inflection point)이라는 견해를 밝혀온 만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흔들리는 주요 동맹국인 한국을 채근해 한·미·일 협력 태세를 조기에 정비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이런 기조는 전날 공개된 미-일 외교·국방장관(2+2) 회의 공동 발표문에서도 확인됐다. 미·일은 이 문서의 ‘3분의 1’가량을 강력한 대중 견제 메시지로 채웠다. 이들은 중국이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혀온 ‘핵심적 이익’에 해당하는 홍콩·대만·신장 문제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한국은 블링컨 장관이 방한 일정에선 절제된 ‘대중 메시지’를 낼 것이라고 봤지만, 회담이 시작되는 순간 이런 기대가 무색해졌다.
블링컨 장관이 ‘말폭탄’을 쏟아내면서 문재인 정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준의 외교적 고민에 빠지게 됐다. 정부는 그동안 미국이 중국 견제 색채가 농후한 인도·태평양 전략을 내세울 때마다 “개방·포용·투명성이라는 원칙에 따라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정책 간 조화로운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는 모호한 입장을 유지해왔다. 동맹을 경시했던 전임 트럼프 행정부는 이런 설명을 일정 부분 수용했지만, 블링컨 장관은 “단순히 동맹 유지가 아니라 강화해서 다가올 시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한국에 던졌다.
또 다른 고민은 북한 문제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전날 미국에 대해 내놓은 비난 담화에, 블링컨 장관이 북한 인권을 거론하며 바로 받아친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서 2018년 6월12일 북·미 정상이 합의한 싱가포르 공동선언을 출발점 삼아 조속히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개한다는 정부의 계획도 차질을 빚게 됐다.
외교부 쪽은 블링컨 장관의 발언에 당혹해하는 분위기다. 블링컨 장관의 ‘작심 발언’은 18일 예정된 한-미 외교·국방장관(2+2) 회의 결과를 담은 공동성명에 이런 내용을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 때문으로 전해졌다. 하루 앞선 외교장관 회담의 ‘머리발언’이 언론에 그대로 공개되는 점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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