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을 찾는 시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8일 오후 꽃다발과 목도리가 쌓여 있는 소녀상을 찾은 시민들이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 부산/연합뉴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상징되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실패가 국내 문제를 넘어 외교안보 영역에서도 파열음을 내고 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주한미군 배치 논란, 부산 일본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둘러싼 한국-일본 정부의 갈등 따위가 대표적이다. 특히 부산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를 둘러싼 갈등은 2015년 한-일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12·28 합의의 기반을 무너뜨릴 폭발의 뇌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정부는 ‘정책의 일관된 추진’과 ‘합의의 성실한 이행’을 되뇌지만,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 의결로 국정 동력을 사실상 상실한 상황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혹스런 처지에 내몰린 형국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한 새 정부가 들어서기 전엔 현실적으로 뾰족수가 없는 만큼, 현 정부가 상황의 추가 악화를 막는 수준의 관리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일단 한-일 정부는 ‘12·28 합의 성실한 이행’을 입을 모아 외치고 있다. 아베 정부가 부산 소녀상 설치에 반발해 주한대사를 일시 소환하는 등 ‘외교적 보복 조처’를 취해 대결 양상이지만, 그래도 ‘합의는 이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한-일 정부가 염두에 둔 ‘합의 이행’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8일 ‘10억엔 거출(출연)’로 일본은 의무를 이미 이행했다고 강조한 뒤, “한국이 확실히 성의를 보여야 한다”며 서울과 부산 일본공관 앞 소녀상 철거를 계속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한테 ‘합의 이행’이란 한국 쪽의 서울·부산 소녀상 철거·이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국정 동력을 상실한 박근혜 정부엔 그럴 의지도 힘도 없다. 한국 외교부 관계자는 “부산 소녀상을 이전하려 하면 ‘국민 감정을 거스르는 조처’라고 비난이 일지 않겠냐”고 말했다. 소녀상 철거·이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가 일본 정부의 ‘보복 조처’에 대해 “당장 추가적으로 취할 조처는 없다”고 말한 이유다. 박근혜 정부로선 촛불민심을 다독일 일본 쪽의 ‘성의 표시’를 내심 바라지만 현실성이 없는 기대다.
부산 소녀상 설치를 계기로 불거진 한-일 갈등은 12·28 합의의 구조적 불균형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12·28 합의는 ‘역사·정의’가 아닌 ‘현실 외교’의 관점에서도 “7대 3으로 일본 승리”라거나 “일본이 너무 이겼다”는 일본 전문가들의 지적이 많았다. 당연하게도 한국 사회에선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한 12·28 합의를 외교적 패배·봉합으로 여기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예컨대 갤럽 여론조사에서 12·28 합의를 일본의 사죄로 본다는 비율이 합의 직후인 2016년 1월 19%이었는데 9월엔 9%로 낮아졌다. 법원은 12·28 합의 관련 소송에서 박근혜 정부에 ‘합의의 법적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라’고 주문한 데 이어, 6일엔 12·28 합의 관련 문서를 모두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문서가 공개되면 추가 후폭풍이 불가피하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는 “12·28 합의는 이미 깨졌다고 본다”며 “역사는 칼로 자르듯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일 양국이 ‘갈등 최소화, 협력 극대화’를 위해 노력하며 장기적으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미국-중국 3국이 뒤엉킨 외교 현안인 사드 배치 문제와 관련해선 ‘박근혜 정부 임기 중 사드 배치 완료’라는 무리수를 둬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많다. 그보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출범 이후 한반도 정책 구체화 과정을 예의 주시하며, 조기대선으로 들어설 새 한국 정부가 ‘한-미-중 3국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이제훈 김지은 기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