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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동틀 녘 독도, 일본 순시선이 다가왔다

등록 2015-08-02 19:12수정 2015-08-03 10:03

광복 70돌의 해인 올해 6월11일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의 동도 헬기장에서 바라본 서도가 수직으로 웅장하게 치솟아 있다. 독도/김정효 기자 <A href="mailto:hyopd@hani.co.kr">hyopd@hani.co.kr</A>
광복 70돌의 해인 올해 6월11일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의 동도 헬기장에서 바라본 서도가 수직으로 웅장하게 치솟아 있다. 독도/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광복·분단 70년 - 다시 쓰는 징비]
① 독도에서 본 광복 70년
독도에 파랑이 일었다. 너울이 허연 거품을 앞세워 동도 선착장 너머로 거칠게 밀려 들어왔다. “오늘은 배가 들어오지 못할 것 같다”고, K2 소총을 멘 채 동남쪽 바다를 지켜보던 한 경비대원이 말했다. 심상한 표정과 어투였다. 파도가 치면 1주, 2주 갇히기 일쑤인 독도의 날씨를 일상으로 겪으며 밴 심상함일 터이다.

과연 울릉도와 독도를 오가는 배들은 이날 선착장에 닿지 못한 채 독도를 한바퀴 돌고는 되돌아갔다. 6월12일 속절없이 하루를 더 머물러야 했다.

주 2회 독도 한바퀴 돌아나가
그때마다 해경 경비정은
밀어내기 대치로 막아내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뒤
일, 집요하게 ‘영유권 주장’

다음날에도 짙게 낀 구름은 새벽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해의 말간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동쪽 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에도, 독도경비대 2층 상황실에는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있었음을 나중에 전해들었다. 새벽 5시께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독도 동쪽 영해선을 향해 접근해왔다. 독도 동도 꼭대기 98.6m 지점에 설치된 레이더가 이를 포착했다. 레이더병은 일본어와 영어로 배가 한국의 영해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고 영해선을 넘지 말 것을 경고했다. 당직관은 곧장 해경 경비정 5001함과 해군·공군 부대로 상황을 전파했다. 24시간 독도 주변을 돌고 있는 해경 경비정이 즉각 일본 순시선 쪽으로 기동하기 시작했다. 일본 순시선은 여느 때처럼 12해리 영해선을 넘지 않은 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독도 주변을 한바퀴 돌아 울릉도와 독도 사이 공해로 빠져나갔다. 일본 순시선은 주 2회가량 독도로 접근한다. “그때마다 해경 경비정이 영해선 안쪽에서 밀어내기 자세로 대치하며 따라 돈다”고 송지원 독도 주둔 경찰경비대 지역대장(경감)이 말했다.

일본 순시선의 독도 접근은 장구한 기간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패전 뒤 미군 포고에 따라 일본 선박들은 한동안 독도 해역에 접근하지 못했다. 하지만 1951년 한국이 빠진 채 연합국과 일본 사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된 것을 계기로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5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 순시선들이 독도에 출현했다. 1953~54년 일본은 한국의 영토 표지를 2차례 제거하고, 4차례 일본령 표지를 세웠다. 한국도 그때마다 이를 뽑아냈다. 53년 7월12일에는 울릉도경찰서 독도순찰반이 영해를 침범했다가 달아나는 일본 순시선을 향해 경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하기도 했다.(정병준 <독도 1947>) 한국전쟁의 한편에서 한때의 식민 강점국 일본과 신생 대한민국 사이에 독도를 둔 또 하나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독도는 작고 외로우리라는 선입견을 깨고 우뚝했다. 울릉도에서 망망대해를 두시간여 배로 달리면 수직으로 치솟은 서도가 먼저 눈길을 잡는다. 168.5m지만, 바다 위에 돌출해 한층 웅장했다. 승객들이 너나없이 “와” 하는 탄성을 토했다. 서도를 마주보며 동도는 151m 거리에 밀착해 있다. ‘국토의 솟을대문’(이근배 ‘독도 만세’)이라는 시인의 묘사는 적확해 보였다.

일본은 대한제국 영토 중 가장 먼저 독도를 강점했다. 바다 한가운데 솟구친 독도의 군사적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러시아의 방해로 한반도에서 물러나야 했던 일본은, 10년 뒤인 1904년 2월 대한제국에 다시 군대를 진주시키면서 러일전쟁을 시작했다. 1905년 1월2일에는 뤼순 요새를 함락시키고, 러시아 극동함대(제1태평양 함대)에 괴멸적 타격을 입혔다. 그 직후인 1월28일 일본은 각의 결정으로 독도를 시마네현에 복속시킨다. 발트해의 기지를 떠나 동해로 향하던 러시아 최강의 제2태평양 함대를 감시할 망루를 독도에 세우려는 목적에서였다. 당시 내무성에서는 “지금의 국면에 한국 영지로 생각되는 황막한 일개 불모지 바위섬을 접수하여 여러 외국에 우리나라가 한국 병합의 야심이 있다는 의심을 키운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야마자 엔지로 외무성 정무국장은 “이러한 때에야말로 영토 편입을 급선무로 해야 할 것이라, 망루를 건설하고 무선이나 해저 전신을 설치한다면 적함 감시가 매우 좋아질 것”이라고 일축했다.(와다 하루키 ‘독도의 역사적 의미와 해결법’)

독도, 우리 국토의 ‘솟을대문’…군사적 가치 커 일본 일찍이 눈독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일 ‘전초기지’ 전략성 중요성 알고
집요한 영유권 주장 억지
방위백서, 독도에 ‘빨간 동그라미’

한국전쟁 와중에도
독도 둘러싸고 한-일 충돌 기록도

독도를 삼킨 일본은, 220일 동안 지구 둘레 4분의 3인 2만9000㎞를 돌아오느라 지친 러시아 함대를 쓰시마 해협에서 대파했다. 이어 달아나는 러시아 함선들을 울릉도 동남쪽 독도 인근 해역까지 추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러시아를 이긴 일본은 미국이 중재한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러시아로부터 인정받게 된다. 일본은 곧이어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5년 뒤인 1910년에는 한반도 전체를 강제병합한다. 독도를 잃은 대한제국은 나라까지 빼앗겼다. 2차대전 패전으로 한반도에서 물러나고도 끝까지 독도 영유권만은 내려놓지 않겠다는 일본의 욕망이 불길한 이유다.

독도를 일본령으로 삼아 군사적 전초기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44년 뒤 미국에 의해 부활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준비 과정에서 미국은 초반에는 줄곧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하는 초안을 작성했다. 하지만 1949년 11월 주일본 미정치고문실의 윌리엄 시볼드 정치담당관이 “리앙쿠르암(독도의 서구 명칭)에 대한 재고를 요청함. 이들 섬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은 유효한 것으로 보임. 안보적 고려에서 그곳에 기상 및 레이더 기지를 상정해볼 수 있음”이라는 의견서를 낸다. 독도를 불안정한 한국보다 만만한 일본 영토로 만들어 대소련 전초기지로 손쉽게 활용하자는 주장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쪽으로 180도 입장을 뒤집고 만다. 이후 일본이 두고두고 ‘미국도 독도가 일본 땅임을 인정했다’며 독도의 분쟁지역화에 나서게끔 만든 배경으로 평가된다.

일본의 노골적 책동에도 독도는 꿋꿋이 한국 영토로 서 있다. 첫째는 한국이 실효적 지배 의지를 뚜렷이 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일본의 ‘전후 평화헌법 체제’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1947년 시행된 일본 평화헌법 제9조는 “국제분쟁 해결 수단으로서 전쟁 및 무력의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고 규정했다. 1953년 독도 충돌 때 일본도 무력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일본 안에서 거세게 일었다. 하지만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은 “헌법 금지 사항”이라며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이 평화헌법 체제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미-중 패권 다툼 가능성이 부상하는 가운데, 아베 신조 총리의 신념에 따라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미국은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부추기며 미·일 군사일체화의 길로 질주하고 있다. 중국 또한 이에 맞서 ‘대국굴기’의 ‘중국몽’을 꿈꾸며 빠른 속도로 군사력을 팽창시키고 있다. 한국의 유일 동맹국인 미국이 미-일 동맹의 확장판으로서 한-미-일 삼각공조 구축에 한국의 참여를 강하게 압박하는 점은 급변하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의 복잡성을 배가한다.

더불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지난 7월20일에는 11년째 <방위백서>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 기재했다. 한·중·일 방공식별구역 표시 지도에는 ‘다케시마’에 영유권을 뜻하는 빨간 동그라미를 쳤다. 과거사 역주행 속에 영토 야심은 폭주하는 양상이다.

그 결과는 110년 만에 다시 한번 동아시아 지정학의 ‘열점’으로 독도가 부각되는 지금의 형국이다. 애초 독도는 460만년 전 지각의 틈을 뚫고 마그마가 분출하는 지질학적 ‘열점’의 생성물로 태어났다. 국가 간 힘과 의지가 충돌하는 열점의 운명이 다시금 독도, 나아가 한반도를 덮치지 않으리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광복·분단 70돌을 맞아 ‘징비’의 의미를 가장 먼저 ‘독도’에서 떠올린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란을 겪고, 또다른 전란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경계하고 삼가는 기록’ <징비록>을 남겼다. 광복 70돌, 구한말 격랑의 그림자가 다시금 어른거린다는 경계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과 일본, 미국, 유럽 지식인 500여명은 7월29일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을 통해 “동아시아의 과거사를 둘러싼 충돌이 민족주의 충돌로 이어지고 영토분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과거 회귀는 전쟁 위기와 안보 불안으로 확대되고 각국 민주주의는 후퇴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한국이 망국의 그때보다 더 강하고 단단한 나라로 성장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분단이라는 난제를 여전히 품은 위에 열강 다툼의 파열음도 높아가고 있다. 묵은 과제와 새 도전이 한데 몰아치고 있다.

류성룡은 변화를 미리 읽지도, 자강하지도 못한 조선의 비극을 징비했다. <징비록> 연구서를 쓴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임진왜란의 끔찍한 경험을 하고도 ‘징비’하지 않은 우리에게 역사는 자비롭지 않았다.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통일된 미래도 우리 것이 아닐 것”(<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이라고 했다. 우리는 어떻게 지정학의 격랑을 이겨낼 것인가? 광복 70돌의 해에 독도 선착장에서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동아시아의 격동을 헤쳐나갈 담대한 상상력을 묻는다. 13일 오전 10시30분께 파도가 조금 순해진 틈을 타 접안한 울릉행 여객선에 올랐다. 독도에는 주민 2명과 등대원 3명, 경비대원 45명, 수를 셀 길 없는 갈매기들이 남았다.

독도/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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