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완상 기념사업추진위원장
한완상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이 12월24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3층 위원장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3·1운동, 임시정부 100년의 의미는 3·1운동 핵심가치는 비폭력·평화 임정, 헌장1조에 ‘민주공화제’ 명시 건국절 주장, 국가·정부 구분못해- 3·1운동과 임정의 현재적 의미는 “3·1운동의 핵심 가치는 ‘비폭력, 평화’다. 일제의 총칼에 태극기만 들고 맞섰다. 요즘의 ‘태극기부대’와 전혀 다르다. 공공성의 수준이 매우 높다. 감동의 파장이 크다. 그만큼 변혁의 가능성도 높다.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개혁개방 40년 기념 연설에서 5·4운동의 중요성을 환기했고,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는 (<세계사 편력>에 실린) 딸한테 보내는 편지에서 3·1운동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런 것들을 우리 자식들한테 가르치지 않았다. 창피한 일이다. 3·1운동 당시 정부는 커녕 시민사회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이, 성별, 종교, 계급의 칸막이를 넘어 인구의 10% 넘게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왔다. 공공적 가치를 구현한 탁월한 사례다. 성숙한 시민사회가 없었는데도 시민사회가 본받을 일을 했다는 점에서, 현재적 의미를 넘어 미래적 의미가 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국토, 국민, 주권이라는 국가 구성 3대 요소가 없다’며 임정을 폄훼하고 ‘진짜 나라가 만들어진 때는 1948년 8월15일’이라고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국가와 정부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일제 침략자들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임정은 ‘망명정부’다. 일제라는 강도가 국가 3요소를 훔쳐 짓밟은 걸 되찾고자 독립운동을 했다. 망명정부일 수밖에 없다. 임정은 3·1운동 한달 열흘 뒤인 1919년 4월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헌장 1조에 ‘민주공화제’를 명시했다. 이승만도 제헌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민주공화제’를 명시했다. 건국절 주장자들은 자기들이 ‘건국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승만의 뜻조차 거스르고 있다. 건국절 주장은 ‘민족의식 없음’을 드러내는 자기고백이다.”
3·1운동 100돌 중점 추진 사업은 3·1운동 남북 공동 기념사업이 중요 남북 상호 ‘악마화 과정’ 끝내는 계기- 위원회에서 중점 추진하거나 추진하고 싶은 사업은 “남북이 공동으로 3·1운동 100년을 기념하려고 하는데, 이게 가장 큰 사업이다. 공동사업이 왜 중요하냐면, 분단 73년간 남북의 상호 ‘악마화 과정’을 끝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어서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남북으로 국토가 분단됐다. 백범 김구, 우사 김규식 선생 같은 분들은 ‘국토 분단이 국가 분단으로 이어지면 민족 상잔은 필연이다. 이걸 막아야 한다’고 호소하며 38선을 넘나들었다. 남북은 1948년 각기 단독정부를 세운 뒤 민족 상잔을 거치며 서로를 악마화하고 적대적 공생관계를 심화·지속해왔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남북이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을 때, 나도 평양에 있었는데 깜짝 놀랐다. 내가 위원장을 맡은 위원회의 간절한 소망이 평양선언에 담기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 공동사업의 의미가 획기적이리라는 걸 나는 그때 평양에서 예감했다. 문 대통령이 평양선언을 발표한 9월19일 능라도 5·1경기장에서 15만 평양 시민 앞에서 연설을 했는데, 나는 평양시민들이 ‘잔인하게 차가운 침묵’으로 대응하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런데 15만 평양시민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로 문 대통령의 연설에 공감을 표했다. 70년 냉전의 빙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눈물이 나더라. ‘악마화’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2018년의 의미는 강대국 100년 ‘갑질’ 민족 트라우마 치유 첫해 평화 역사 커튼 열린 해- 식민, 분단, 전쟁의 역사에서 2018년의 의미와 위상은 “100년에 걸친 강대국의 갑질에 너무 억울하게 당한 우리 민족의 고통(트라우마)을 남북이 함께 치유하려 애쓴 첫 해가 아닌가 싶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기적처럼 평화프로세스가 시작됐다. 4·27 판문점선언, 6·12 북-미 공동성명, 9·19 평양선언…. 2018년의 역사적 의미는 상전벽해적인 평화 역사의 커튼이 열리기 시작한 해라는 데 있다. 우리 민족의 트라우마는 다른 민족보다 더 아프고 깊고 부당하다. 2차 세계대전 뒤 식민지배를 받던 약소국은 대부분 해방됐다. 우리는 오히려 분단됐다. 갈라진다면 전범국인 일본이 갈라져야지, 왜 36년간 식민지배의 고통을 당한 우리가 갈라져야 하나. 그 뒤에 미국이 주도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있다. 왜 이에 분노하지 않나. 우리는 교과서를 통해 우리 민족의 이런 역사적 트라우마, 한을 치유하는 일에 정과 성을 보여준 적이 없다. 오히려 박정희의 딸은 국정교과서로 이런 치유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려고 했다. 분단 뒤 친일 냉전세력이 이땅을 지배해온 탓이다. 이들이 한미동맹을 맹신하는 나머지 우리 헌법가치를 소홀히 하는 데 대해 나는 염려한다.”
2019년 희망은 올해 친일·반공 ‘앙시앵레짐’ 퇴출하고 국제 냉전 대결구도 해체로 나아가야- 한반도 평화 과정의 맥락에서 2019년은 어떠해야 한다고 보나 “최근 북-미 관계가 삐걱거리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남북 철도협력 사업, 비무장지대 감시초소 철수·검증 등 4·27과 9·19 합의를 꾸준히, 뚝심있게, 조용히 끌고 가는 현실을 보고 있기에 절망하지 않는다. 미국이 이 정도로 강하게 나올 때 과거 같으면 (남북 협력 강화를) 엄두를 못냈는데 지금은 하고 있다. 3·1운동의 평화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이들은 ‘트럼프식 신고립주의’의 추이를 두 눈을 크게 뜨고 살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군사패권주의 지배체제를 바꿀 수밖에 없는 경제적 이유를 안다. 그가 자기 말대로 미국의 국외 군사기지를 줄이는 등 ’국제경찰’ 노릇을 그만두고 국내 경제기반 강화에 나선다면,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은 오히려 높아진다. 지금 트럼프 때문에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세계 지식인이 많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트럼프가 우리한테 주는 이상한, 변종적인 희망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다만 트럼프가 진짜 신고립주의로 가려면 일본을 앞세워 신냉전질서를 만들려는 짓을 그만둬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유연할지 모르겠다.” - 2019년에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일은 “첫째, 우리 위원회가 정부 부처들과 함께할 105가지 구체적 사업이 일제의 반평화적 정책을 극복하는 평화시민과 평화국가의 공동운동으로 번지기를 바란다. 친일과 반공의 ’앙시앙레짐’을 퇴출시키는 시작이 되면 좋겠다. 둘째,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으로 조성된 국제 냉전 대결 구도를 해체시키는 쪽으로 가면 좋겠다. 셋째, 중국 정부가 애초의 ‘도광양회’의 신중한 처신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미-중이 군사·경제적으로 전면 충돌하면 우리 민족의 갈 길이 막막해진다. 3·1운동 100년 기념사업으로 한반도 평화를 진전시킬 작은 힘이라도 만들면 좋겠다.”
한완상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24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3층 위원장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평화와 경제의 관계는 평화정책 경제효과 내면 냉전질서 쉽게 녹아 문 대통령 동아시아철도공동체 구상 잠재력 커 ’먹고사니즘’과 평화는 ’떡마니즘’ 토양은 경제적 불평등 ’시장갑질’ 잡는 ’적극정부’ 절실-요즘 대세로 불리는 ‘먹고사니즘’에 평화는 어떤 의미인가 “먹고사니즘은 먹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역사적으로 포퓰리즘으로 집권한 세력의 공통 요소다. 포퓰리즘은 집권에 효과적이지만, 집권 이후엔 배고픈 사람을 더 쉽게 조종하는 객체로 전락시킨다. 우리 역사에선 전체주의 확장에 먹고사니즘을 악용한 박정희의 ‘잘살아보세’가 대표적이다. ‘경제적 불평등이 포퓰리즘의 토양’이라는 토마 피케티의 통찰은 중요하다. 먹고사니즘을 내식으로 바꿔 말하면 ‘떡마니즘’이다. 떡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건데, 요즘 제1야당이 ‘떡마니즘’을 무기로 정부를 공격한다. 큰 시장을 국가가 규제하면 안 된다는 그 사람들이 정말 밑바닥 사람들의 떡을 걱정할까? 낙수효과 이론이 먹히지 않은 지 오래다. 떡마니즘은 철지난 카드다. ‘바보야, 이제 떡보다 중요한 가치가 많아’라는 게 포용사회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포용사회를 위해 내세운 포용경제와 공정경제 사이에 깊은 갭이 있다. 정부가 이 갭을 합리적으로 메우지 못하고 있다. 포용경제는 공정경제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는다. 갑은 자신의 횡포를 이야기하지 않고 을, 병, 정이 서로 싸우게 한다. 최근 최저임금 인상 효과가 안 나는 이유다. 정부가 시장의 갑질 패권세력을 관리하는 데 적극적이어야 한다. 작은정부-큰정부 논란은 낡았다. 적극정부여야 한다. 작은정부라도 갑질 시장세력과 결탁하면 ‘세월호’ 같은 비극이 계속 생긴다. 적폐 청산은 미래 열기와 별개의 일이 아니다.”
정부·시민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 선제적 평화만들기로 ‘적대 공생’ 깨고 촛불정신 따라 평화 만들게 도와야 ‘트럼프발 카오스’에서 희망 찾아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남북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확실하게 깨져야 한다. 우리 민족의 트라우마가 깊고 넓다. 지난 100년은 알면 알수록 너무 원통한 역사다. 꼭 치유해야 한다. 선제적 평화만들기가 중요하다. 촛불 덕에 이 정부가 탄생하지 않았나. 앞서가는 시민세력이, 우리 정치세력이 촛불정신에 따라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리고 미국발 카오스적 바람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트럼피언 카오스’라고 하고 싶은데, 절망만은 아니다. 카오스 속엔 늘 희망이 있었다. 카오스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오게 돼 있다. 촛불시민의 성숙한 의식과 언론의 목탁의식이 절실한 때다.” 이제훈 노지원 기자 nomad@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