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 공군이 지난 14일 한반도 상공에서 연합공중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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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이 길어지면 슬며시 안도감과 섞인다. 정전체제 70년 그리고 윤석열 정부 1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위험성을 제기했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었다. “‘양치기 소년들’은 이제 잠잠할지어다. 국민들은 안심하시고 생업에 전념하십시오.” 마음의 평안을 주는 메시지들이 나올 법하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쯤 지나면 여러 가지 평가가 나온다. 때 이른 면이 없지 않다. 정책을 새로 만드는 데 상당한 시간을 썼을 테고 전 정부를 탓할 이유도 남아 있을 것이다. 안보정책을 평가하는 것은 외교나 경제와 같은 분야에 비해 일견 단순하지만 생각보다 어렵다. 외교에서는 우호와 적대 관계가 직관적으로 드러나고 손익을 평가할 수 있는 후속 조처들이 바로 현실화한다. 경제는 객관적인 지표들이 말해준다. 그러나 안보는 평가의 기준을 설정하는 것부터 논란의 대상이 된다. 단순히 전쟁이 없었으면 만점인가. 무기를 많이 사들이고 훈련을 강화하면 대비태세에 대하여 높은 점수를 줄 것인가. 위협과 정책, 어느 것이 원인이고 결과인가.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힘에 의한 평화’를 내세웠다. 대북 선제타격론, 9·19 군사합의 무용론, 종전선언 반대 등을 주장했고, 당선 뒤 지체 없이 한-미 연합훈련의 ‘정상화’, 북한주적 표현 부활, 확장억제 강화 등의 정책을 실행했다. 그 일관성과 이행 속도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다만 이런 정책의 총체적인 목표인 ‘한반도 평화’가 어떤 상황에 와 있는지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강대강’ 대응은 사안별 조처를 두고 한 말이지만 더 근본적인 정책과 전략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북한도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명백해졌다. 남한이 말하는 힘이란 미국의 핵공격용 전략자산을 필수불가결의 요소로 포함한다. 북한은 자체적인 핵무력과 그에 관련된 다양한 무기체계로 국방력을 구성한다. 현 상황에서 평화란 남북한에 공히 ‘전쟁 억제(부재)’라는 가장 소극적인 의미만 지닌다.
북한은 2021년 1월 제8차 당대회에서 ‘국방과학 발전 및 무기체계 개발 5개년 계획’과 ‘최우선 5대 전략과업’을 제시했다. 최근까지 그 실행 속도가 놀랍다. 핵무기 자체를 보면 소형화와 함께 초대형 핵탄두 생산을 지속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2022년 말 당전원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탄 보유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것을 요구”했고 올해 3월에는 다량의 카트리지형 전술핵탄두로 보이는 ‘화산-31형’을 공개했다.
핵무기 운반수단으로서 1만5천㎞ 사정거리의 대륙간탄도탄(ICBM) 명중률을 제고하려는 과업을 위해 2022년 11월 ‘화성-17형’ 시험발사에 성공했고 올해 3월에는 ‘발사훈련’을 단행했다. 수중 및 지상 고체추진 아이시비엠 개발에서는 2022년 12월 대출력 고체연료 엔진의 지상 시험을 마친 뒤 지난 4월13일에 이를 장착한 ‘화성-18형’ 발사시험에 성공했다. 극초음속 활공비행 전투부 개발을 위해서는 2021년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3차례 시험발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제시된 핵잠수함 및 핵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당대회에서 이미 연구를 종료하고 최종시험 단계임을 주장했다.
‘5대 과업’ 외에도 북한은 사거리 1500㎞의 지대함 순항미사일 ‘화살-1형’을 2021년 9월에 1차 시험발사하고 올해 2월과 3월에는 사거리 1800㎞ 이상의 ‘전략순항미사일’(화살-2형)을 발사해 목표 상공에서 공중폭발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신무기’는 ‘핵무인수중공격정 해일’로 명명된 전략무기다. 지난 3월과 4월 1천㎞ 거리를 70시간 이상을 잠항해 목표 지점에서 수중 기폭에 성공했다고 북한 매체는 보도했다. 추진엔진과 배터리 능력에 따라 이론상으로는 한달 안에 ‘천천히’ 미국 동해안에 도달해 핵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무기다.
무기 개발뿐 아니라 군사행동 면에서도 북한은 지난 1년간 더 과감해졌다. 미사일 ‘시험’은 핵미사일 운용 ‘훈련’이 됐고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반응은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모든 군사작전에서 핵무기 사용을 기정사실화한 것으로 보이며 2022년 9월의 핵무력정책 법제화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핵무기의 특성상 북한의 핵무력 증강은 미국의 확장억제력 제고보다 ‘한계효용’이 더 크다. 북한과 미국의 핵무기 경쟁은 양과 질 양면에서의 경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은 최단 시일 내에 다양한 투발수단을 보유해 단 한 발이라도 ‘본토’ 공격에 확실히 성공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 할 것이다. 경제와 기술 수준에서 개발이 불가능한 전투기와 자체 미사일방어체계는 포기하고 핵공격용 미사일·잠수함·정찰위성 등 상대의 방어체계를 뚫을 수 있는 전략무기 개발에 집중하는 이유다.
평화와 거리가 먼 힘의 대결장이 되고 있는 한반도에서 남북한과 미국은 각각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다. 남한은 북한을, 북한은 미국을, 미국은 중국을 응시한다. 주변국들의 엇갈린 시선들은 전통적으로 한반도에서 실제로 전면전이 발생하는 것보다는 관리 가능한 긴장 상태에서의 현상유지를 선호했다. 북한이 핵무장을 한 이후에도 그들의 한반도 정책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짙어지는 핵전쟁의 그림자 아래에서 아직 조금이라도 밝은 부분을 찾아보자. 그렇다. 현실적으로 모든 것이 북한과 미국에 달려 있다. ‘다행히도’ 북한은 탈냉전 이후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공격적 대남 군사전략을 핵억제전략으로 바꿨다.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정상국가로서의 ‘번영’을 국가전략목표로 채택했다. 핵은 수단이므로 경제와의 병진은 ‘때가 되면’ 무게중심이 경제 쪽으로 갈 것이다.
미국 역시 북한의 핵무력 강화로 시선의 일부를 북한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아마 ‘때가 되면’ 북한과의 대화가 대변인의 연단이 아닌 테이블 위에서 이뤄질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이 ‘확장억제 강화’만을 요구한다면 미국은 난감해하고 북한은 한심해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한-미 핵협의그룹’ 설치 합의를 한국은 동맹 역사상 최대의 성과로 내세울 테지만 ‘군사적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사실을 미국은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에나 북한에나 한국이 그렇게 난감하지도 한심하지도 않은 나라임을 확인시켜야 한다.
전 국방대 교수
노무현 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기획실 국방담당,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군사과학 기술의 이해> 등의 저자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