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두번째 재의요구권(거부권)을 지역 간호와 간호사 처우 개선 내용이 담긴 간호법 제정안에 행사하면서 정부·여당과 거대 야당이 또다시 정면으로 충돌했다. 더불어민주당과 대통령이 각각 입법권과 거부권을 상대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무기’로 쓰면서도, 정작 해당 법안에 영향을 받는 이들의 피해 대책엔 손을 놓고 갈등을 키우는 행태가 지난 양곡관리법 재의 요구에 이어 또다시 재현되는 모양새다.
간호법 재의요구권 행사까지의 과정을 짚어보면, 국회와 정부가 간호법을 충분히 논의하고 관련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시간은 있었다. 코로나19로 간호사의 과도한 업무와 열악한 노동 환경에 공감대가 커지면서, 2021년 3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엔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서정숙·최연숙 국민의힘 의원이 각각 발의한 간호법 제정안 3개가 올라갔다.
대한의사협회와 간호조무사협회 등이 크게 반발했지만, 두 당과 정부 모두 갈등 조정의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그해 11월 보건복지위 법안소위 회의록을 보면, “사회적 합의를 정부가 손 놓고, 정치권에 떠넘기고 있다”(서영석 민주당 의원), “법 제안을 의원님들께서 해주셨기 때문에 (다른 단체들과의 중재) 그 부분은 행정부가 임의로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류근혁 보건복지부 2차관)라는 식이었다. 또한 국민의힘은 ‘직역 간 조정이 필요하다’며 법안 논의에 소극적이었다.
이후 대선 과정에서 두 당은 모두 간호법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윤 대통령도 지난해 1월 서울 중구 대한간호협회 사무실을 방문해 “법안(간호법)이 국회로 오게 되면 정말 공정과 상식에 합당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도록 저희 의원님들께 잘 부탁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당선 이후 윤 대통령은 간호법과 관련한 별도의 언급을 하지 않았고, 국민의힘은 ‘직역 갈등’을 이유로 법안 처리를 거부했다. 대통령실은 간호법 처리가 윤 대통령의 공약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한표가 아쉬운 대선 후보가 이익단체를 찾아가 이들의 숙원 사업에 이런 메시지를 낸 것은 ‘공식적인 약속’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크다. 대한간호협회가 “공약을 지키라”고 반발하고, 야당이 ‘당선되니 태도를 바꿨다’는 취지로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2월 민주당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건너뛰어 간호법을 본회의에 직회부하고, 급기야 지난달 27일 본회의에서 다른 야당과 함께 통과시키면서 대한의사협회가 집단 진료거부에 나서는 등 직역 간 갈등은 더욱 고조됐다. 여야는 정치적 타협과 대화 대신, 각자 편가르기에 바빴다. 애초부터 ‘포퓰리즘법’이라고 비판했던 양곡법과 달리 간호법엔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대통령실도 ‘간호사 대 의사·간호조무사 등 다른 직역’의 전선에 올라탔고, 급기야 간호법을 “간호사 이기주의”로 몰아붙이며 재의요구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여야가 협의해 법안을 만들어주면 정부도 그에 따라 행정조치를 취하겠지만, 특정한 정치세력이 일방적으로 법을 통과시킨다면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국민 입장에서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곡관리법과 마찬가지로 간호법도 폐기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간호사 처우 개선 정책을 실시하겠다고 밝혔지만 간호사들의 요구에 얼마나 부합할지, 높아지는 지역사회 돌봄 수요엔 어떻게 대처할지, 직역 간의 모호한 업무 범위는 어떻게 선을 그을지 불투명하다. 2년여 정치적·사회적 갈등 비용만 남긴 채, 원래 이 법안의 목적은 사라질 위험이 큰 셈이다.
더 큰 문제는 민주당이 단독 처리를 예고한 방송법·노란봉투법 등 쟁점 법안이 쌓여 있고 여권에선 이미 재의요구권 행사가 예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권에선 여야가 치열하게 격돌할 내년 총선까지 이런 정치 실종으로 인한 ‘비정상의 일상화’가 고착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 때문에 여당 안에서도 “국정 운영의 열쇠를 쥔 윤 대통령이 야당을 만나 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 지도부의 한 의원은 “우리가 집권 여당이니 대통령도 야당을 만나서 현재 대립의 정치를 조금이라도 풀어가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서영지 임재우 배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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