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앞 잔디마당에서 열린 ‘2022 대한민국 중소기업인대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기업인들과 핸드프린팅을 마치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2022년 8월, 115년 만의 폭우가 전국을 덮쳤다. 14명이 목숨을 잃고 6명이 실종됐다.(15일 오후 6시 기준) 서울 관악구 반지하에 살던 4인 가족 중 3명이 사망자 명단에 포함됐다. 노동자, 초등학생, 노인,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가족이었다. 추모하는 이들은 “재난은 약한 이들에게 더 가혹하다”고 했다. 재난과 불평등의 심연 앞에 윤석열 대통령은 17일 취임 100일을 맞는다.
취임 100일을 맞아 <한겨레>는 윤석열 정부의 단어를 짚었다. ‘대책’ ‘방향’이란 이름을 달고 나온 딱딱한 문장이지만 그 차가운 단어는 현실의 비극과 이어져 있다. 기업과 노동자, 대기업과 영세기업, 고소득자와 저소득자, 주류와 소수자, 그 불균형한 관계 앞에서 ‘조정자’로서 정부가 내놓는 한마디 한마디는 시민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킨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 100일 동안 누구에게 부담을 지우고, 누구의 부담을 덜고, 어떤 태도로 갈등을 중재하고자 했는지 살피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전문가들은 정부 역할이 ‘10년 만의 변화’를 겪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양한 양상으로 심화하는 불평등 앞에 조정자로서 정부의 역할은 쪼그라들고 있다는 진단이다.
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 추이1(위), 주요 정책 발표1(아래).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 추이2(위), 주요 정책 발표2(아래).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박근혜·문재인 정부는 그 실현 여부를 떠나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다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첫번째 경제정책방향(2013년 3월)에서 ‘적극적인 거시 정책’을 가장 앞자리에 적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또한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2017년 7월)에서 ‘선도적인 재정 투자와 가계소득 증대’를 약속했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 중반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기업 활력을 더 강조하는 방향 전환이 있었지만, 그럴 때조차 격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은 부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불평등의 실태를 전부 드러내기에 불완전하지만, 정부의 재분배 이후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을 비교한 ‘가처분소득 기준 5분위 배율’, 국민소득에서 고용된 노동자의 몫을 뜻하는 ‘노동소득분배율’ 같은 지표(
그래픽 참조)는 2010년대 초반 이후 다소나마 개선되는 흐름을 보인다.
재분배 이후 ‘소득 5분위 배율’ 추이(위), 노동소득분배율 추이(아래).
2022년 5월10일, 그런 한국 사회에서 윤석열 정부가 임기를 시작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 말했고, 8·15 경축사에서도 33번 말했다. 그러나 ‘불평등’은 말하지 않았다. ‘자유’의 범람과 ‘불평등’의 부재는 단지 표현을 넘어 100일 동안 다양한 정책으로 구현되고 있다. 세금과 규제 등 대기업의 부담을 줄이고, 재정은 적극적인 운용보다 효율화에 방점을 찍었다. 노동자와 회사, 대기업-중소기업의 갈등에서 제도보다 자율적 해결을 강조한다.
여력 있는 곳에서 걷어 필요한 곳으로 나누는 정부 재분배의 시작점인 세제는 특히 대기업 중심의 감세 기조로 돌아섰다. 법인세 최고세율을 인하(25%→22%)한 것이 대표적이다. 과세표준 3000억원 이상을 버는 100여개 대기업이 수혜를 입는다.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대기업의 세액공제율은 높여(6→8%) 중견기업과 같은 수준이 됐다. 규제는 줄였다. 기업 경제활동과 관련한 형벌 규정을 완화하기 위한 조직(경제형벌규정 관련 TF)을 꾸리고 독과점 사업자의 기준을 완화하겠다는 계획(경제정책방향)도 밝혔다
정부는 대기업의 세 부담과 규제를 덜며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초격차”(경제정책방향)를 지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글로벌 대기업의 월등한 경쟁력을 지원하기 위해서 그 이면에 놓인 교육과 지역 균형, 기업 양극화 해소 등 다양한 가치는 후순위로 밀렸다. 교육부가 ‘반도체 인재 양성’을 위해 수도권 대학 정원 규제를 완화하기로 했고, 피해를 입을 지역 대학이 반발하는 식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대기업 지원을 통한 초격차는 낡은 개념”이라며 “기업 양극화를 해소하고 재벌 독과점 구조를 깨뜨려 다양한 기업의 진출·퇴출이 자유로워야 혁신의 토대도 마련된다”고 말했다.
초격차 구현을 위해 희생된 것들 맨 앞자리에는 줄어드는 세수가 있다. 올해 세법 개정안으로 앞으로 5년 대기업·고소득자를 중심으로 세금 수입이 60조2천억원(누적) 줄어든다.
윤석열 대통령이 6월16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판교 제2테크노밸리 기업성장센터에서 열린 새정부 경제정책방향 발표 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재정전략회의(7월7일)는 “건전재정 기조로의 전면 전환”을 선언했다. 8·15 경축사에서는 “긴축”과 “구조조정”이란 단어로 그 기조를 좀 더 명확히 했다. 세금 수입이 줄어든 상황에서 건전재정을 위해 정부가 꺼내 든 단어는 ‘효율화’다. “비대해진 공공부문을 효율화”하기 위해 공공기관의 불필요한 자산을 매각하도록 했다. 공공기관 평가는 재정건전성을 중심으로 바꾸고 사회적 가치 배점은 낮춘다.(2021년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결과 및 후속조치) 그동안 공공성 강화를 방향으로 삼았던 돌봄 등 사회 서비스 영역은 민간과 시장 중심의 공급으로 전환한다.(경제정책방향)
재정 지출의 내용을 다듬고 정교화하는 과정은 중요하다. 다만 ‘축소’를 전제하는 재정 효율화란 시민으로서 받아온 공적 수혜를 시장으로 넘겨 소비재로 바꾸는 노릇을 한다. 당장 노인을 비롯한 노동 취약계층은 “재정지원 일자리 창출, 고용보조금 지원 중심에서 벗어나”야 할 일자리 정책 패러다임 전환의 대상자가 됐다.(국가재정전략회의) 기준 중위소득 이상을 버는 코로나19 확진자는 “효율성 제고”를 위해 생활비와 치료비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코로나19 생활지원 및 치료비 지원 제도 개편 적용) 기획재정부는 인구 감소 적응을 위해 “교육재원·시설 효율화”를 계획했고, 이어 교육부는 ‘만 5살 초등학교 조기 입학’을 돌연 발표했다.(기획재정부·교육부 업무보고) 초등학교의 남는 재원을 효율적으로 나눠 쓰기 위해 만 5살 아이들을 동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다만 윤석열 정부도 최소한의 사회보장까지 줄이지는 않고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기준이 되는 내년 기준중위소득이 예년보다 큰 폭(5.47%)으로 늘었고, 기초연금의 단계적 인상 또한 추진된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최저 수준의 삶만 보장하되, 기존에 정부가 제공하던 공공 서비스는 시장에서 각자 부담 능력에 맞춰 서로 다른 것을 차별적으로 구매하는 방식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격차는 좀 더 미묘하고 다양하게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7월18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노동조합 파업 관련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담화문 발표에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함께 참석했다. 연합뉴스
경남 거제에서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이 극단으로 내몰릴 때, 장관 6명은 언론 앞에 나란히 서서 “노사자율을 우선하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대우조선해양사태 관련 대국민 담화문) 그러나 그곳은 하청과 원청, 산업은행이 서로 책임을 떠넘겨 자유롭게 대화할 ‘회사’의 존재마저 불투명한 현장이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자율적 교섭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노사 관계를 회피하는 사업장을 비롯해 다양한 노사의 권력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 100일 동안, 서로 다른 힘을 지닌 이들 사이 조정이 필요한 갈등의 현장에서 ‘자율’이 제도나 정부를 대신했다. 플랫폼 대기업과 입점사업자의 관계는 애초 추진해온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 법안’ 대신 ‘시장 자율 규제’에 맡기기로 했다. 안전 분야에서 ‘기업 자율의 안전관리체계 구축’도, 원·하청 기업의 ‘자율적 납품단가 조정 확산’도 비슷한 맥락이다.(110대 국정과제) 정세은 교수는 “자율만 있는 공간이라면 이미 존재하는 권력 관계로 인해 불평등은 계속 커지게 마련이다. 이를 막고 줄이는 것이 정부와 제도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방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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