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16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대선후보 선출대회에서 당선된 뒤 두손을 든 채 브이(V)자를 그려보이고 있다. 고양/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이인제의 도전과 과제
“해가 뜨기 전엔 달만 보인다. 이명박은 달이고 나는 해다.”
16일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이인제 후보가 최근 측근들에게 자주 하는 얘기다. 범여권 후보단일화와 본선의 문턱을 넘어 기필코 대통령을 하겠다는 야심이 묻어난다.
그의 이번 대선 도전은 3수째다. 그는 얼마 전 기자들과 만나 “정말로 마음을 비웠더니 기회가 오더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마음을 비웠다고 했다. 민주당 경선에 뛰어든 것이 그저 내년 총선이나 겨냥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의 핵심 측근은 “이 후보는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되는 것 말고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세번째 도전엔 일단 무모하다는 평가가 많은 게 현실이다. 〈한겨레〉의 지난 10일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의 지지율은 1.2%에 그쳤다. 조사대상 후보 7명 가운데 맨 꼴찌다. 그가 속한 민주당 지지율 6.4%보다도 훨씬 낮다. 대선은 2개월 앞으로 성큼 다가섰지만, 지지율을 끌어올릴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범여권 단일 후보로? 선호도 정동영의 1/4…가능성 낮아
단일화 실패땐 승복? 명분 서겠지만 정치적 입지 불투명
민주당 후보로 직행? 내년 총선서 민주당 통해 재기 도모 그에겐 ‘경선 불복과 거듭된 탈당’이라는 선명한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난 7월5일 대선출마 선언을 하면서 과거 두 차례의 경선 불복을 사과했고 이번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국민들이 그의 사과를 받아들일지는 극히 불투명하다. 다른 후보들이 자동차나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는 경주에서 혼자서만 맨발로, 그것도 무거운 짊을 지고서 뛰는 형국이다.
이 후보는 특유의 다부짐으로 민주당에 복당한 지 5개월만에 대선후보 자리를 거머쥐는 저력을 내보였다. 당 안팎에선 이 후보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평가가 많다. 이 후보의 이기훈 대변인은 “이 후보가 당내 경선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만큼, 경선 불복 등의 약점에 대한 국민적 평가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겐 세 갈래 길이 있다. 후보단일화에 적극 나서 범여권 단일후보 자격을 얻는 것이 최선이다. 쉽지 않다. 〈한겨레〉의 범여권 단일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이 후보는 6.9%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28.5%)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민주당 지지층(64명)에서도 이 후보(12.4%)보다 정 후보(42.6%)를 단일후보로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번째는 후보단일화에 나섰다가 실패하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길이다. 이 경우 그는 ‘범여권 대선 승리를 위해 양보했다’는 명분을 잡을 수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반대급부는 불확실하다. 대선 후보를 포기한 그가 민주당 또는 새로운 통합정당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진다는 보장은 없다. 세번째는 범여권 후보단일화를 피한 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12월 대선에 끝까지 도전하는 길이다.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적지만 내년 18대 총선에서 민주당을 바탕으로 재기를 도모할 수 있다. 충청권에 지역기반이 있는 그로선 호남에 기반을 둔 민주당을 통해 내년 총선에서 입지를 넓혀갈 수 있다는 계산을 할 법하다. 대통령을 포기한다면 무난한 선택이다. 정치적 고빗길에서 몇차례의 무리수를 두며 자산을 탕진했던 이인제 후보는 이제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이인제 누구인가 4차례 탈당 ‘굴곡’…‘중도개혁’ 기치 민주당 복귀
대선 3수와 네 차례의 탈당이 보여주듯이 한국 정치사에서 이인제 후보만큼이나 곡절 많은 이도 드문 것 같다. 지난 두 차례 대선 도전에 실패하면서 재기가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는 오뚝이처럼 일어나 중앙 무대에 다시 섰다.
이 후보는 1948년 12월 충남 논산 연산면에서 4남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이 되도록 초등학교를 입학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집안은 가난했다. 중학교 진학도 어려웠지만 “시험 잘 봐서 5등 안에 들면 돈 없이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며 부모를 설득해 논산중학교에 들어갔다. 중 3 때 만난 부인 김은숙씨는 이후 이 후보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려던 이 후보의 진로를 서울대 법대로 틀었고, 오래 끈 고시생 시절 뒷바라지를 도맡았으며 중요한 정치적 분기점마다 결정적 조언자였다.
서른을 넘겨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81년 대전지법 판사를 거쳐 2년 만에 변호사 개업을 하는 등 사회생활의 출발은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열기가 뜨겁던 1987년 9월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를 통해 정치에 입문하면서 초고속 성장을 거듭한다.
이듬해 4월 13대 총선에서 경기 안양에 출마해 40살의 젊은 나이로 당선됐다. 그해 열린 ‘5·18 청문회’에서는 논리정연한 질의를 선보여 노무현·이해찬 의원과 함께 ‘청문회 스타’로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90년 3당 합당 때 김영삼 총재를 따라가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역대 최연소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95년 첫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경기지사로 당선되며 자신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렸다. 여세를 몰아 97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도전해 ‘세대교체’를 기치로 걸고 선전했으나, 당내 ‘이회창 대세론’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문제가 불거지고 지지율이 급락하자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독자 출마하기에 이른다. 500만에 가까운 표를 얻으며 선전했으나 3위에 그쳤다. 이때부터 이 후보에게는 ‘경선 불복’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이 후보는 정치적 내상이 심했지만 98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로 둥지를 옮기면서 두번째 도전에 나섰다.
2002년 신년 여론조사에서 그는 30%가 넘는 대선 후보 선호도를 보이며 대세론을 형성했다. 그러나 새롭게 도입된 국민경선에서 ‘이인제 대세론’은 ‘노무현 돌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후보는 청와대 음모론을 제기하며 경선을 중도에 포기했고 같은 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당시 노무현 후보의 선출을 “여론공작과 전류처럼 흐르는 광기가 일으킨 소용돌이로 당이 표방하는 중도개혁주의의 깃발은 부러지고 반미친북이라는 정체불명의 급진좌파가 대통령 후보 자리를 거머쥐면서 당을 점령하는 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이 후보는 2002년 대선 직전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에 입당하며 ‘정치적 방랑’ 생활을 시작한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탄핵 역풍을 뚫고 4선에 성공해 건재를 과시했다. 한 달 뒤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돼 정치생명이 끝날 위기를 맞았지만, 법원의 무죄 판결로 다시 살아났다. 2005년 12월에는 자민련을 탈당해 ‘중부권 신당’을 표방한 국민중심당으로 옮겼고, 2007년 5월에는 “중도개혁에 힘을 보태겠다”며 민주당에 다시 돌아왔다. 초반 조순형 의원의 그림자에 가려 있다가, 특유의 뚝심으로 세번째 도전장을 거머쥐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단일화 실패땐 승복? 명분 서겠지만 정치적 입지 불투명
민주당 후보로 직행? 내년 총선서 민주당 통해 재기 도모 그에겐 ‘경선 불복과 거듭된 탈당’이라는 선명한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난 7월5일 대선출마 선언을 하면서 과거 두 차례의 경선 불복을 사과했고 이번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국민들이 그의 사과를 받아들일지는 극히 불투명하다. 다른 후보들이 자동차나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는 경주에서 혼자서만 맨발로, 그것도 무거운 짊을 지고서 뛰는 형국이다.
이 후보는 특유의 다부짐으로 민주당에 복당한 지 5개월만에 대선후보 자리를 거머쥐는 저력을 내보였다. 당 안팎에선 이 후보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평가가 많다. 이 후보의 이기훈 대변인은 “이 후보가 당내 경선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만큼, 경선 불복 등의 약점에 대한 국민적 평가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겐 세 갈래 길이 있다. 후보단일화에 적극 나서 범여권 단일후보 자격을 얻는 것이 최선이다. 쉽지 않다. 〈한겨레〉의 범여권 단일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이 후보는 6.9%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28.5%)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민주당 지지층(64명)에서도 이 후보(12.4%)보다 정 후보(42.6%)를 단일후보로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번째는 후보단일화에 나섰다가 실패하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길이다. 이 경우 그는 ‘범여권 대선 승리를 위해 양보했다’는 명분을 잡을 수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반대급부는 불확실하다. 대선 후보를 포기한 그가 민주당 또는 새로운 통합정당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진다는 보장은 없다. 세번째는 범여권 후보단일화를 피한 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12월 대선에 끝까지 도전하는 길이다.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적지만 내년 18대 총선에서 민주당을 바탕으로 재기를 도모할 수 있다. 충청권에 지역기반이 있는 그로선 호남에 기반을 둔 민주당을 통해 내년 총선에서 입지를 넓혀갈 수 있다는 계산을 할 법하다. 대통령을 포기한다면 무난한 선택이다. 정치적 고빗길에서 몇차례의 무리수를 두며 자산을 탕진했던 이인제 후보는 이제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이인제 누구인가 4차례 탈당 ‘굴곡’…‘중도개혁’ 기치 민주당 복귀
이인제 후보가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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