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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밀월의 끝인가? 애초 적과의 동침이었나?

등록 2006-07-12 18:04수정 2006-07-13 17:05

한나라당 서울지역 기초단체장 공천 비리 의혹과 관련해 정치적 파장이 확산되던 지난 4월 박근혜 대표와 이재오 원내대표가 의원총회 회의장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한나라당 서울지역 기초단체장 공천 비리 의혹과 관련해 정치적 파장이 확산되던 지난 4월 박근혜 대표와 이재오 원내대표가 의원총회 회의장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박근혜-이재오의 ‘관계’에 대한 일고찰
감춰진 밀월이 끝나자, 정답게 보이던 관계의 본질이 드러났다.

“저쪽(박근혜쪽)이 다 공작한 것이다. ‘박근혜-이명박’ 대리전 냄새를 풍겨 ‘박심’을 자극하고, 박 전 대표도 노골적으로 가담했다. 내가 전당대회장에서 연설할 때 박 대표가 자리를 뜬 것은 사실상 연설방해 행위로밖에 안 보인다. 내가 원내대표 할 때 그렇게 잘 모셨는데 한마디로 배신행위 아니냐.”

‘박근혜 대표와 이재오 원내대표’의 갈등은 두 사람의 말처럼 봉합된 게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11일 치러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강재섭 의원이 이른바 ‘박심’에 힙입어 당 대표로 선출되자, 이재오 최고위원은 12일 박근혜 전 대표에게 쌓였던 불만을 쏟아냈다. 그는 이날 열린 최고위원 회의에도 불참,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재오 의원은 2002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선대위원장, 서울시장 직무인수위원장을 지내 ‘이명박 사람’으로 통한다. 이 의원은 박 전 대표를 ‘독재자의 딸’, ‘유신 공주’라고 비판한 바 있지만 올 1월 소장·개혁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원내대표에 당선된 뒤 박 전 대표에게 바짝 엎드리는 모양새를 취해, 이재오 의원의 진짜 ‘복심’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7.11 전당대회는 두 사람의 감춰진 밀월의 유효기간이 다했음을 알려줬다.

이 의원은 전당대회 이튿날일 12일 “한나라당 내 색깔론이나 대리전, 부패 정치를 온몸으로 나서 청산하겠다”며 “한나라당이 새로 태어나지 못하고, 내부의 분열을 조작하고, 특정 후보의 대리가 되서 이 당을 쪼개려고 한다면 온몸으로 막아내겠다”고 말해, 박 전 대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 ‘1라운드’ 이재오 “독재자의 딸이 당 대표가 되면 한나라당 망한다”

(서울=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 전 대표와 이재오 의원은 오래 전부터 ‘앙숙’이었다. 박 전 대표와 이 의원의 태생과 이력, 정계입문 계기가 상반된 탓이다. 두 사람은 그동안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며, ‘위험한 신경전’을 벌여왔다. 이 의원은 2003년 탄핵 정국에서 ‘한나라당 구원투수’로 화려하게 등장한 박 전 대표에 대한 독설을 쏟아부었고, 박 전 대표 또한 이 의원의 공세를 적극적으로 맞받아쳤다.

‘박-이’의 기싸움이 시작된 것은 2004년 총선 이후다. 박 전 대표가 총선에서 위기의 한나라당을 구했지만, 당 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7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두 사람의 갈등은 표면화된다. 유신시절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이 의원은 “유신독재의 딸인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의 간판얼굴로 부각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독재자의 딸이 당 대표가 되면 개인은 영광이겠지만, 한나라당과 야당은 망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스포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 전 대표가 무슨 정치적으로 대단한 업적이 있어 대표가 됐느냐”며 “박 의원이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하고 있지만 2007년에 출마하면 100전 200패”라고 공세를 이어갔다. 이 의원은 전당대회 3일 전에도 “최병렬 전 대표가 5·6공의 상징이란 이유로 물러나는 정치적 흐름에서 군부쿠데타와 유신독재 핵심세력의 딸이 야당의 대표가 되는 모습은 적절치 않다”며 “부친의 공과는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유신독재에 대해서는 딸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2라운드’ 박근혜 “그러면 왜 총선 때 도와달라고 했냐. 치사하고 비겁하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전당대회를 앞두고 벌어진 ‘박-이’의 1라운드는 박 전 대표의 승리였다. 박 전 대표는 이 의원과 소장·개혁파의 공격에도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주춤했던 이 의원은 2004년 8월 전남 구례 농협교육원에서 열린 연찬회를 앞두고 2라운드를 개시했다. 당시 박 전 대표로 분류되는 주류와 이재오 의원 등의 비주류는 과거사와 수도이전 문제를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 또 박 전 대표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 안팎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재오 의원은 당시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표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사퇴해야 한다”며 “한나라당이 과거 박정희 대통령의 공을 내세워 5·16 군사쿠데타나 유신독재의 반민주·반인권성을 덮으려 해서는 안 되며, 박 대표는 잘못된 것을 겸손히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 2라운드의 포문을 열었다.

박 전 대표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역사에 죄가 많은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면, 왜 지난 선거(총선) 때 도와달라고 했느냐. 치사하고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3공·5공이 당의 뿌리인지 모르고 들어왔느냐.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대표를 흔들려면 아예 나가라”고 연찬회에서 초강수를 빼들었다.

박 전 대표의 경대응에 이재오 의원을 비롯한 비주류는 움찔했지만, 이 의원의 고집은 꺾지 못했다. “박 대표의 발언은 한나라당의 창당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위헌적 발상의 이야기”라며 “한나라당이 5·16 쿠데타는 물론 유신독재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그 지도자는 합헌적 지도자가 될 수도 없다”고 반박했다.

이 의원은 그해 9월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글을 통해서도 박 전 대표를 압박했다.

“당 대표로서의 행위를 ‘시혜 행위’로 간주하고 지원연설 하나로 굴종을 요구하는,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행위 앞에서 어떠한 미련이라도 가지면 안 된다. 유신적 발상을 가진 채 ‘미소의 가면’만으로는 언제까지나 국민을 속일 수는 없다. 친일 독재의 위헌적 전통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한다.”

(박 대표가 ‘한나라당의 뿌리가 3공·5공’이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 “한나라당의 창당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위헌적 발상의 이야기다. 한나라당이 5·16 쿠데타는 물론 유신독재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그 지도자는 합헌적 지도자가 될 수도 없다”

◇ ‘3라운드’ 이재오 “‘친일진상규명법’은 마녀사냥 박대표 주장” 정면반박
“야당이 먼저 친일 밝히자고 하고 여당이 덮으려 해야 정상”

이종찬 기자 <A href=”mailto:rhee@hani.co.kr”>rhee@hani.co.kr</A>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그러나 2라운드 역시 박 전 대표의 압승으로 마무리됐다. 박 전 대표를 비난했던 이 의원은 당내에서 거센 질책에 직면했다. 한동안 이 의원은 침묵을 유지했고, ‘박-이’의 대립도 잠잠한 듯 보였다. 그러다 지난해 ‘친일진상규명법’과 ‘행정도시특별법’을 두고 갈등은 다시 폭발했다. 이 의원은 박 대표가 “마녀사냥”이라고 친일진상규명법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과 ‘행정도시특별법’을 당론으로 채택한 것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 3라운드를 시작한다.

열린우리당이 2004년 7월13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채택한 것에 대해 박 대표는 “불순한 정략적 의도가 담긴 마녀사냥”이라고 반발했지만, 이 의원은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열린우리당의 개정안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흠집내기라는 일방적 의도만 강조하며 반대하는 것은 옛날 한나라당 방식이다. 수구보수의 논리로 기득권을 지키는 과거와 같은 논리는 더 이상 안 된다. 야당이 먼저 친일 행적을 밝히자고 주창하고, 여당이 덮으려 해야 정상”이라고 박 대표와 다른 의견을 냈고, 우리당의 개정안 국회 제출에 동참해 박 대표의 심기를 건드렸다.

또 ‘행정도시특별법’이 한나라당 당론으로 채택된 뒤 지난해 3월 국회를 통과하자 이재오 의원 등은 박 대표의 만류에도 불구 행정도시 반대 농성을 벌여 박 대표의 지도력에 타격을 입혔다. 당시 박 대표와 이 의원 사이의 감정의 골은 깊게 패여 되메우기가 힘들 정도까지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 ‘4라운드’ 이재오 의원, 박대표 측근 김무성 꺾고 원내대표 당선

‘박-이’의 충돌의 4라운드는 올 1월 전당대회다. 박 전 대표는 측근인 김무성 의원을 측면 지원했지만, 이재오 의원이 예상을 누르고 이 의원이 원내대표에 선출됐다. 이로써 갈등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는 당선 인사말에서 “크고 작은 일을 박 대표와 상의해 당을 안정시키고, 강력한 대여투쟁으로 당의 위기 타개에 한몸을 바치겠다”고 소감을 밝혔고, 이후 박 전 대표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모습을 보였다.

교사 출신인 이 의원은 또 “여당이 사합법 재개정 협상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2월 임시국회는 없을 것”이라며 사학법 재개정에 사활을 걸어 박 대표를 만족시켰다. 이 의원이 “내가 원내대표 할 때 그렇게 잘 모셨는데…” 발언은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갈등이 완전히 봉합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의원이 ‘사학법 재개정’에 사활을 걸었던 것은 박 전 대표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 7월11일 전당대회 출마를 굳힌 이 의원이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는 독자적으로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북한산 회동을 성사시켜 박 전 대표를 당혹스럽게 했다.

◇이재오, 원내대표 당선 뒤 최대한 충돌 자제…박대표 위해 사학법 재개정에 몸던져

<시비에스>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는 “개인의 감정이나 이념을 전면에 내세워서 당의 갈등의 한 축을 이룬다거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박 대표가 사학법 투쟁을 국가정체성 문제로 규정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등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결국 이번 전당대회에서 박심은 드러났다. 사사건건 박 전 대표의 발목을 잡았던 이 의원에게 박 전 대표는 통쾌한 ‘한방’을 날렸다. 더이상 둘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 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거나 최고위원으로서의 역할을 소홀히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박 전 대표를 경계하고, 당내 소장·개혁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라도 이 의원이 목소리를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당내 유력 후보군인 박 전 대표와 이명박 시장의 우군인 이재오 의원이 한 배를 탈 리도 없다. ‘박-이’의 기싸움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 박근혜-이재오, ‘불화’와 ‘친밀’ 무엇이 더 자연스러운가

이재오 의원이 박 전 대표에 대립각을 세우는 이유는 뭘까. 두 사람의 태생과 이력, 정계입문 과정이 말해준다. 박 전 대표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으로 정계에 진출, 한나라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인 대구·경북과 보수층의 지지에 힘입어 탄핵 이후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을 구했다. 이후 선거마다 박 전 대표의 지원은 한나라당의 승리와 선전의 보증수표가 됐다.

반면 이재오 의원은 중·고교에서 10여년간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조국통일위원장과 민중당 사무총장 등 재야활동을 거쳐 정계에 진출했다. 이 의원은 재야활동으로 1973년부터 유신시절에만 세 차례 투옥됐다. 이 중 한 번은 안동에서 강연을 하면서 안동댐 당시 새마을봉사단 총재였던 박 전 대표의 ‘방생비’를 비난해 구속되기도 했다. 이 의원의 ‘빛나는 과거’는 ‘유신 독재’에 대한 투쟁과 투옥으로 볼 수 있다. 그에게 유신시절 영부인 역할을 한 박 전 대표가 곱게 보일리 만무하다. 이 의원의 ‘유신독재의 딸’ 발언이 돌출발언이 아닌 셈이다.

두 사람의 ‘불화’가 새삼스럽기보다, 서로 발톱을 감춘 채 다정한 모습을 보인 것이 ‘연기’이자 ‘거래’인 것으로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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