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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편집국에서] 너희는 지우라, 우리는 기억하리 / 김영희

등록 2016-02-28 18:42수정 2016-02-28 19:46

김영희 사회 에디터
김영희 사회 에디터
“여기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아들과 손자들이 내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까봐 가슴 졸였어. 그렇지만 10년 다 되도록 온 세상 사람들이 알도록 선전해왔는데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사진만 찍으면 뭐해. 한번씩 찾아오기만 하면 뭐해.”

15년 전 이맘때다. 일본 고등학생 120여명과 함께 취재차 찾은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처음엔 할머니 몇 분이 학생들을 만나지 않겠다며 역정을 냈다. 부끄럽지만 당시엔 한국에 평화학습여행을 온 일본 학생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이내 “이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예뻐” “공부 잘해서 총리가 돼야 해” 하며 주름진 손으로 학생들을 안아주셨지만 말이다.

지난해 9명, 올 들어 2명. 부쩍 잦아진 할머니들의 타계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때가 떠오른다. 10년 가까이 바뀐 게 없다고 하던 할머니들인데, 15년이 더 흘렀다. 이렇게 길 줄 누가 알았으랴. 심지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도 그랬던 것 같다. 199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중반 ‘정신대’가 들어간 단체 명칭을 바꾸자는 정식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두 차례 논의에도 이름이 유지된 배경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논란과 함께 “곧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텐데 어차피 해산될 임시 성격의 단체가 명칭을 바꾸면 혼란을 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고 윤미향 정대협 대표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슬픈 일인지 다행스러운 일인지, 요즘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높은 때는 없었다. 수요시위 규모도 달라졌다. 지난 세월 ‘나비기금’을 만들어 전쟁과 성폭력에 신음하는 콩고와 베트남 여성들을 돕는 등 피해자에서 평화인권운동가로 변모해온 할머니들의 손을, 이제야 우리 사회가 제대로 잡기 시작했다. 역설적으로 박근혜 정부 덕이 크다.

흥행 1위의 기적을 쓰고 있는 영화 <귀향>이 투자에 난항을 겪을 때, 시나리오만 읽고 결혼자금이나 청약통장을 깨 수천만원씩 내놨던 사람들은 카센터 운영자, 배관공, 헬스트레이너 같은 평범한 이들이었다. 멀티플렉스의 스크린을 크게 늘려놓은 것도 일반관객들의 사전예매의 힘이다. ‘일본군 ‘위안부’ 정의와 기억재단 추진위원회’엔 노랑봉투 캠페인 한 달여 만에 성금이 1억5천여만원 모였다. 지난주에도 삐뚤빼뚤 글씨가 쓰인 신청서가 우편으로 도착했다. 인천에 사는 한아무개양 자매는 “마침 세뱃돈을 받아 다행”이라며 세뱃돈을 천원 단위까지 보내왔다. 어떤 선생님은 아이들과 토론한 뒤 한 해 동안 학급에서 모은 ‘지각 벌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참여한 사람들은 ‘적은 액수밖에 도울 수 없어 정말 미안하다’는 글을 많이 남긴다고 한다.

반면 ‘최종적·불가역적’ 합의를 일본에 내준 정부는 3월부터 쓰일 초등학교 6학년용 사회 교과서에서 애초 실험본에 실렸던 일본군 ‘위안부’ 사진을 빼고 용어도 삭제했다. 여성가족부는 2년 연속 연 위안부 국제 학술심포지엄을 ‘검토중’이라며 뭉개고 있다. 백서 사업, 국제 학생 작품 공모전 등도 마찬가지다. 지금 미안해야 하는 것은 어느 쪽인가.

<귀향>이 인상적이었던 점 가운데 하나는 일본군에 대한 분노를 선동하지 않으면서 위안소를 위탁운영했던 민간업자의 존재나 위안부에 동정적이었던 일본군의 사례까지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제국의 위안부>가 한국인들이 외면해온 ‘사실’이라고 그토록 주장하는 내용들이다. 영화를 보면 알 것이다. 그럴수록 국가와 군의 책임은 더 선명하게 떠오름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성숙해진 시민들의 인식이 정부의 합의 몇줄로 바뀔까. 우리는 이미 12·28 합의를 넘어서고 있다.

김영희 사회 에디터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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