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고위급 접촉이 25일 새벽 전격적으로 타결됨으로써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적어도 최근 고조된 한반도 긴장을 가라앉히고 남북관계를 전환시킬 토대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와 이전 이명박 정부를 합쳐 7년 반 동안 남북이 이런 수준의 합의를 이룬 것은 처음이다. 이는 또한 집권한 지 4년에 가까운 북한 김정은 정권의 남북관계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북은 이제 이번 합의를 성실하게 발전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새 관계 토대 이룰 중요한 합의
이번 합의는 우선 군사적 긴장 해소의 새 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6개 항의 합의문 가운데 절반이 이에 할애됐다. 합의문 2항은 “북쪽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쪽 지역에서 발생한 지뢰폭발로 남쪽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라고 돼 있다. 긴장 고조의 출발점인 지뢰폭발사건에 대해 ‘북쪽’이라는 주어를 명시해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북쪽이 이제까지 지뢰 도발 자체를 부인해온 점을 생각하면 큰 태도 변화다. ‘유감’이라는 표현이 남쪽이 요구해온 ‘사과’에는 못 미치지만 그 현실적인 의미는 작지 않다.
재발 방지와 관련해선 “남쪽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모든 확성기 방송을 25일 12시부터 중단하기로 했다”라고 했다. 지뢰 사건에 대응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되 ‘비정상적인 사태’가 생기면 다시 재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비정상적인 사태가 뭔지에 대해선 남북의 생각이 다를 수 있으나 재발 방지 노력의 의지가 담긴 것은 확실하다. 이런 합의는 이번에 나타난 치킨게임 식의 ‘강 대 강’ 대결 양상을 억제하는 데 일정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남북관계와 관련해 중요한 합의는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진행해 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 또한 북쪽이 이제까지 고위급 대화 등을 기피해온 점에 비춰보면 일정한 태도 변화다. 북쪽은 우리 정부가 우선적으로 제기해온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포함해 상봉 정례화를 사실상 받아들였다. 아울러 남북은 ‘다양한 분야에서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했다. 북쪽이 오랫동안 탈북자 단체 등의 대북 전단 살포 중지, 금강산 관광 재개, 5·24조치 해제 등을 강하게 주장해온 점에 비춰보면 남쪽 요구가 더 많이 반영된 주고받기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합의를 두고 여권 일부에서는 ‘원칙의 승리’ 라는 말이 나온다. 대체로 대북 강경대응이 효과를 봤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는 섣부른 발상이다. 이번에 북쪽이 확성기 방송 중단 문제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화를 먼저 제의한 쪽도 북쪽이다. 북쪽 목표가 대화 분위기 조성에 있었다면 북쪽으로선 전체적으로 ‘불만 없는 일보후퇴’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한반도 긴장 고조로 인한 국가적 스트레스를 실감해야 했다. 합의 결과가 어느 쪽에 유리한가를 놓고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상호 신뢰 구축과 안정적인 남북관계 조성이라는 측면이 더 앞서야 한다.
새로운 남북관계 구축에서 이번 합의는 출발점일 뿐이다. 우선 어떤 남북관계를 만들어갈 건가에 대한 폭넓은 청사진이 필요하다. 과거 남북은 두 차례의 정상회담 성과를 바탕으로 경협, 사회·문화 교류, 정치·군사 현안 등에서 다양한 내용의 협의를 하고 상당한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새로 시작될 남북 당국자 회담은 이를 충분히 염두에 두고 논의 틀을 갖춰야 한다. 양쪽이 이미 내놓은 제안을 고집하기보다는 남북관계의 앞날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전처럼 매사에 엄격한 상호주의를 내세워서는 사사건건 충돌하기가 쉽다.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고 남북 경제·사회 공동체를 만들어간다는 비전 아래 여러 가능한 방안을 함께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 먼저 정부 안팎의 다양한 목소리를 창의적으로 종합하고 정부의 가온머리(컨트롤타워)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이에 못잖게 중요한 일이 북한 핵 문제를 풀려는 노력이다. 남북관계와 북한 핵 문제는 별개이면서도 하나다. 남북관계 발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직간접적으로 핵문제와 얽히지 않을 수 없다. 남북관계는 핵문제 해결 노력의 유효성을 뒷받침하지만 거꾸로 핵문제는 남북관계의 수준을 규정한다. 핵문제 해결의 주된 무대인 6자회담은 이미 7년 가까이 열리지 못하고 있다. 이제 불신의 고리를 끊고 한자리에 마주앉아야 한다. 그 주된 동력은 이제 관련국 모두와 깊이 소통할 수 있게 된 우리나라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이 적극 나서도록 해야 함은 물론이다. 시기적으로는 북쪽의 노동당 창건 70돌(10월10일)이 있는 이번 가을을 넘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핵문제 해결 노력이 중요하다
이번 합의는 박근혜 정부의 중요한 성취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앞으로의 노력에 달려 있다. 북쪽은 남쪽과 신뢰를 쌓으면서 개방·개혁에 나서는 열린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진전은 평화통일의 밑거름이 되는 것을 넘어서 동북아 안정과 발전의 주춧돌이기도 하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