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는 ‘공용어’로 압도적 지위를 유지하겠지만 이민자가 늘어남에 따라 다양한 ‘공동체의 언어’가 등장할 것이다. 영어 외의 공동체 언어를 한국어와 함께 배우는 제도권 교육도 가능해 보인다. 2017년 2월 서울 동작구에 사는 아시아 여러 나라 이주여성들이 관내 다문화가족지원센터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로버트 파우저ㅣ언어학자
코로나19로 멀리 나가지 못하는 대신 매일 산책을 한다. 그러다 보니 동네 구석구석을 잘 알게 되었는데, 집 근처 초등학교 구호가 “공동체의 언어로 가르치기”(teaching in the languages of our community)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공동체’ 의미는 꽤 넓다. 학교가 속한 권역(프로비던스) 아이들은 물론, 인접한 다른 도시 아이들도 이 학교 학생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도시를 초월한 지역 전체를 뜻한다. 공동체의 언어란 무슨 뜻일까? 1980년대 이후 이 지역에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이민자가 급증했다. 그 이전에는 포르투갈에서 온 이민자들도 많았고, 아프리카 대륙 여러 나라 출신 이민자 가정도 많다. 영어 외에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 사용자가 가장 많다. 이렇게 사용자가 많은 언어가 곧 공동체 언어다.
이 학교에서는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 오전 오후 수업을 나눠 진행한다. 한 학생이 하루에 영어와 스페인어 또는 포르투갈어로 수업을 받는다. 이민자 가정 학생들은 수업을 영어로도 듣지만 모어로도 듣는다. 영어가 모어인 학생들은 다른 언어를 자연스럽게 배운다. 이처럼 둘 이상의 언어로 교육하는 학교는 1990년 무렵부터 이민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등장한 이래 미 전역으로 퍼져나간 지 오래다.
우리 동네에서 영어는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공용어다. 영어 실력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말한 ‘생애 기회’(Lebenschancen)와 관계가 깊다. 생애 기회란 개인의 사회경제 상황과 연관되어 있고, 물질적 정신적 필요를 채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내가 사는 로드아일랜드에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 그가 가질 수 있는 생애 기회는 현저히 줄어들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학교에서 영어 외에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가르치는 이유는 뭘까? 바로 ‘공동체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 공동체를 구성하는 이민자들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나아가 존중하기 위해서다. 동시에 이민자 가정 아이들은 가정의 언어를 학교에서도 유지할 수 있으며 문화적 뿌리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 언어 개념은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이 섞여 있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윈윈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고 보면 ‘외국어’라는 표현은 이미 20세기 산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언어적으로 다양한 미국에서 영어 외 다른 언어를 ‘외국어’라고 지칭하는 것은 배타적인 느낌이다. 이런 배타성을 줄이기 위해 이미 미국 각 주의 교과 과정, 지역 교육위원회에서는 ‘외국어’라는 말 대신 모든 인류의 언어를 포용하는 ‘세계 언어’(world languages)라는 표현을 쓴다.
얼핏 보면 한국과는 관계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럴까? 한국을 미국처럼 ‘이민 국가’로 부르지는 않지만 1990년대부터 한국을 떠나는 이민자들보다 들어오는 이민자들이 더 많고, 지금 추세대로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진행되면 이민자들은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 인구 구성 역시 다양해질 것이며 언어적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한국어는 여전히 공용어로 압도적 지위를 유지하겠지만 지역에 따라 다양한 공동체의 언어가 등장할 것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이미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공동체 언어가 등장한 사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학교에서도 공동체의 언어로 가르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지만 한국은 미국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한국어 외에 다른 언어를 배워야 한다면 영어를 우선 선택할 것이라는 점이다. 로드아일랜드에서 영어를 못하는 이민자의 생애 기회가 줄어들게 되는 것처럼 한국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이가 확보할 생애 기회는 다른 언어와 비교할 수 없다. 이런 현실은 일선 학교에서 다양한 언어를 공동체의 언어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발상을 조금 달리해 보면 어떨까. 한국인들, 또는 한국에 이민 온 이들에게 중요한 언어는 무궁무진할 테니 다양한 언어를 접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쪽으로 말이다. 영어 외에 다른 언어를 선택해도 생애 기회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면 다양한 언어를 선택할 가능성이 커지지 않을까? 함께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친구의 나라 언어일 수도 있고, 한국과 교류가 많은 나라 언어일 수도 있다.
‘외국어는 곧 영어’라는 ‘외국어 교육’은 어쩐지 낡아 보인다. 21세기 학생들에게 어울리는 다양한 언어 교육으로 그들이 접할 세상의 무대를 좀더 넓혀주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