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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언어 사용에 관한 젠더논쟁의 향방

등록 2023-11-29 18:40수정 2023-11-30 02:36

언어 사용에서 젠더적 중립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유럽에서 나오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언어 사용 문화를 인위적으로 손보려 한다며 반발하는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프랑스에서는 공문서에 중성 표현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이 상원을 통과했고, 독일에서는 카이 베그너 베를린 시장이 ‘시민들’을 중성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Bürger*innen’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진은 올해 6월 한 행사장에서 연설하는 카이 베그너 베를린 시장의 모습. EPA 연합뉴스
언어 사용에서 젠더적 중립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유럽에서 나오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언어 사용 문화를 인위적으로 손보려 한다며 반발하는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프랑스에서는 공문서에 중성 표현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이 상원을 통과했고, 독일에서는 카이 베그너 베를린 시장이 ‘시민들’을 중성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Bürger*innen’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진은 올해 6월 한 행사장에서 연설하는 카이 베그너 베를린 시장의 모습. EPA 연합뉴스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어쩌면 유럽에서 2023년은 ‘언어 논쟁의 해’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언어를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다.

가장 큰 논쟁은 역시 젠더와 관련 있다. 영어에서의 젠더 논쟁은 1960년대 여성주의 운동에서 비롯했다. 여성과 남성을 드러내는 단어 대신 젠더를 알 수 없는 중성적인 단어를 쓰자는 것이 당시 논쟁의 핵심이었다. 젠더 구별은 여성의 평등과 활동 범위를 억제하는 남성우월주의를 반영하고 재생산하기 때문에 그런 구별은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 받아들여졌다. 일상적으로 쓰던 단어들에 변화가 일어났다. ‘mailman’(집배원)이나 ‘fireman’(소방관)이 ‘mail carrier’나 ‘firefighter’가 되었다.

영어만 해도 젠더가 복잡하지 않아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유럽대륙 쪽 사정은 좀 다르다. 스페인어나 프랑스어 같은 로망스어군의 모든 명사는 문법적으로 여성 또는 남성으로 나뉜다. 대상의 젠더를 알면 그에 맞추지만 그렇지 못하면 대개 남성형, 일반적으로는 남성 복수형을 사용한다. 스페인 헌법에서 ‘시민들’은 남성 복수형인 ‘ciudadanos’다.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모든 단어는 남성 복수형이다. 친구의 아이가 ‘여자’면 ‘niña’(여성), ‘남자’면 ‘niño’(남성)지만, 일반적으로 ‘아이들’을 말할 때는 남성 복수형인 ‘niños’다. 영어처럼 단어를 바꾸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여성과 남성을 가리키는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말이 길어져서 불편한 데다 거부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여성과 남성을 나란히 쓰는 것도 중립적이거나 평등한 표현이 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마침표 표시가 유행하고 있다. ‘친구들’은 ‘amies’(여성)와 ‘amis’(남성)인데, 중성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ami.e.s’로 쓰는 식이다. 하지만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유난히 강한 프랑스에서 논란이 없을 수 없었다. 언어의 역사성과 순수성을 중요시하는 보수적 시선으로 보자면 이런 변화는 영어로부터 받은 악영향이며, 프랑스어를 오염시키는 행위다. 반면 언어를 통해 젠더적 평등을 추구하려는 이들은 언어란 늘 늘 변화하는 것이니 더 나은 지향점을 향해 변화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이런 서로 다른 의견이 대립하는 와중에 상원은 이달 초 프랑스 정부의 모든 공문서에서 중성 표현을 쓰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마크롱 대통령 역시 이에 동의하고 있으니 하원에서도 통과돼 법으로 제정될 가능성이 크다.

로망스어군 뿐만 아니라 게르만어군에 속하는 독일어의 젠더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명사는 여성, 남성, 중성으로 나뉘지만 사람과 관련된 단어들의 젠더 구별은 뚜렷하고, 스페인어와 프랑스어처럼 복수일 때는 거의 남성으로 표현한다. 올해 취임한 카이 베그너 베를린 시장은 보수 정당(기독민주당) 소속 정치인답게 일반 ‘시민들’의 중성적 표현인 ‘Bürger*innen’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Bürger*innen’은 남성인 Bürger과 여성을 가리키는 어미인 ‘innen’의 합성어로, 가운데 별표는 중성을 뜻한다. 베그너 시장의 반대가 아니더라도 이런 식의 표기나 표현은 보기에 낯설고 발음도 어려워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과연 쉬울까 싶다.

지난 9월 말 오스트리아 ‘빈 건축 센터’(Architekturzentrum Wien (Az W))안내판에 ‘주역들’의 중성적 표현이 보인다. 사진 로버트 파우저
지난 9월 말 오스트리아 ‘빈 건축 센터’(Architekturzentrum Wien (Az W))안내판에 ‘주역들’의 중성적 표현이 보인다. 사진 로버트 파우저

그렇다면 젠더를 둘러싼 언어 논쟁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역사적으로 보면 새로운 단어는 늘 생겨났다. 하지만 단어 사이에 마침표와 별표를 사용하는 것은 이전에는 없던 커다란 변화다.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표기법 관리 기관에서는 이러한 표기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언어의 젠더적 중립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점점 커지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예측하기 어렵긴 하지만, 원론적으로 사회가 변하면 언어도 변한다는 원칙을 생각하면 방법이야 어떻든 언어에서의 젠더적 중립성은 언젠가 반영되고 나아가 정착하지 않을까 전망한다. 여기에 나의 바람이 섞여 있는 것 아니냐고 한다면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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