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칼럼] 서경식ㅣ도쿄경제대 명예교수
아내(F라고 하겠다)의 허락을 받고, 그녀에 관한 얘기로 시작한다. 이런 얘기를 쓸지 말지 잠시 고민했으나 결국 쓰기로 했다. 이런 것도 2021년이라는 시대(나는 그것을 ‘무자비한 시대’라 부르기로 했다)의 일본과 세계에 관한 하나의 필요한 증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F는 최근 2년 정도 몸이 아파 고생하고 있다. 전문의의 진단은 일단 ‘불안신경증’으로 돼 있다. 저녁에 날이 어두워지면 정체불명의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아침은 잠에서 깼을 때부터 불안감이 있고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온갖 치료를 시도해봤으나 눈에 띄는 효과는 없다.
전문의가 “무엇이 그렇게 불안한가요?”라고 묻자 F는 “미얀마나 아카기(赤木)씨 같은 일이…”라고 대답했다. 미얀마에서 계속되고 있는 시민에 대한 탄압 얘기이고, ‘아카기씨’는 상급자로부터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모리토모 비리 의혹에 관한 자료 수정 명령을 받고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살한 재무관료 얘기다. 그러자 ‘전문의’는 “당신은 일본에 있어요. 일본은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곳이니 그런 것 신경쓰지 마세요. 밝고 즐거운 일만 생각하세요”라고 나무라듯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도 놀랐는데, F는 더 놀랐을 것이다. ‘정신과 치료’라는 게 이런 것인가?
나는 F가 미얀마에서 자행되고 있는 정치폭력이나 부당하게 희생당한 하급관료와 그 가족 때문에 마음 아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남의 일’로 무시하는 것이 ‘치료’일까? 게다가 F의 남편인 나는 한국 군사정권 시대의 정치범 가족이었다. ‘사형’이나 ‘고문’이라는 말은 내게 ‘남의 일’이 아니라 늘 신변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다. 곁에 있던 F도 마음 아파 했다.
F의 증상에는 많은 복합적인 요인이 겹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세계 상황’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의사에게는 국내외의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단이 없고, 거기에 맞는 처방전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불안’의 원인에 대한 환자 본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공감을 표시하며 대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것이 틀림없이 치료에도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도 F도 “일본은 안전, 안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일본은 예컨대, 갈 곳 없는 여성 홈리스(노숙자)가 밤에 버스 정류장에서 두들겨 맞아 죽는 곳이다.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도 없어질 기미가 없다. 그렇기는커녕 이대로 가다간 구미처럼 직접 폭력을 행사하는 ‘헤이트 크라임’(증오 범죄)이 빈발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정말 걱정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사가미하라시의 시설에서 일어난 중증 심신장애자 대량살인사건으로 현실화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전염병’과 같은 것이다.
나는 이번에 20년 남짓 일한 도쿄의 어느 사립대학을 무사히 정년퇴직했다. 거기에 안도한 사람이 다름 아닌 F다. F는 내가 그 대학에 취직했을 때부터 우익과 차별자들의 표적이 돼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언제 대학을 그만둘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안고 살아왔다고 한다.
F가 그런 불안에 시달린 것은, 1930년대의 독일에서 유대계 대학교수들이 히틀러 지지자들(특히 친나치 학생단체)의 공격으로 일부는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일부는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역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는 물론 F에게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을 ‘남의 일’로 여기라는 조언은 결코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을 함께 걱정하고 함께 개선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 즉 ‘연대’만이 진정한 위로가 된다. 노파심일지도 모르겠으나 굳이 얘기하자면, F는 일본 국적의 일본인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던 중에 라지 수라니씨로부터 메일이 왔다. 라지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거점을 둔 인권단체(Palestinian Center for Human Rights)의 주재자다. 나와 그는 어느 텔레비전 프로 때문에 2003년 처음 오키나와에서 대담을 했고, 그 뒤 2010년과 2014년에도 도쿄에서 만난 사이다. 늘 이 단체명으로 가자의 인권 상황에 관한 비통한 보고가 들어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라지 본인 개인 이름으로 메일(원문은 영어)이 왔다. 그 첫머리는 이렇다.
“이것은 내가 평생 목격한 것 중 최악이다. 가자에 안전한 공간은 없다. 참으로 피투성이고, 야만이다. 그들은 밤낮으로 가자의 200만명에게 테러 공격을 하고 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다시는 태양을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
이스라엘군의 격렬한 공습을 받고 있는 곳에서 리얼타임으로 보낸 보고다.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탄압에 대해 가자지구에서 봉쇄당해온 하마스가 항의의 로켓을 발사했고,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규모 공습을 시작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보도진에 “이건 아직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도쿄신문> 5월14일). 이스라엘은 지금 가자지구 지상 공격을 감행할 태세다.
이런 뉴스는 F를 더욱 깊은 불안에 빠뜨렸다. F도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라지를 존경스러운 친한 벗으로 생각해왔다. “당신도 라지처럼 확실하게 하세요”라는 등 나를 질책한 적도 있다. 그 소중한 벗과 그의 동포들이 죽음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또다시 이를 ‘남의 일’로 보고 지나칠까.
라지는 위에 인용한 메일 후반에 그다운 메시지를 남겼다. “우리에게는 체념하고 ‘선량한 희생자’가 될 권리는 없다.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그들과 ‘침묵의 공모’ 관계에 있는 자들에게도. 우리는 희망과 결의를 계속 지켜나갈 것이다.”
아, 세계는 얼마나 무자비한가. 나는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연대의 뜻을 전하는 짧은 메일을 보내는 것뿐이다. 그런 거라면 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 이렇게 멀리 떨어진 극동의 땅에 무력하지만 당신의 고통에 공감하고 있는 자가 있다, 그것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미얀마, 벨라루스, 홍콩…, 손이 닿지 않는 세계의 곳곳에서 서로 만날 수도 얼굴을 볼 수도 없는 곳에서, 사람들의 고뇌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고뇌에 ‘공감’(compassion)하면 해결 곤란한 고뇌를 떠안게 되고, 자신의 심신마저 상처받게 된다. 하지만 그래서 ‘공감’ 따위 하지 않는 게 더 나은 걸까. 그래도 ‘공감’하게 되는 게 인간이 아닐까. ‘연대’하려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그런 정신 기능까지 포기했을 때 ‘비인간화’는 완성되고 ‘전염병’이 개가를 올리게 될 것이다.
번역 한승동(독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