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역사란 저쪽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이쪽의 세계이다. 저쪽 세계인 것은 지나간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쪽 세계인 것은 그것의 흔적이 지금, 여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시간의 허공이 가로놓여 있지만 우리는 흔적을 통해 저쪽을 들여다볼 수 있다. 흔적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저쪽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이쪽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찬ㅣ 소설가
1992년 발표한 나의 중편소설 <완전한 영혼>에 ‘장인하’라는 인물이 나온다. 1980년 5월18일 인쇄소 식자공이었던 장인하는 광주 누문동 골목에서 청년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계엄군을 우연히 목격하고 말리려 다가갔다가 계엄군의 폭력에 청력을 상실한다. 청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부터의 추방을 뜻한다. 말이 단절된 세계, 집단에서 소외된 세계는 끔찍한 형벌이다. 그 형벌을 장인하는 ‘식물적 정신’으로 견딘다.
<완전한 영혼>을 쓴 후 가슴에 가시처럼 박혀오는 존재가 있었다. 계엄군이었다. 인간이 존엄한 것은 목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악덕은 인간을 도구의 존재로 전락시키는 데 있다. 이 악덕을 극단적으로 표출한 사건이 5월 광주였다. 당시 전두환의 신군부는 반란으로 획득한 권력을 지키기 위한 폭력이 필요했다. 광주의 참상은 신군부가 계획한 프로그램의 결과였던 것이다. 계엄군을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희생자로도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내가 1995년 발표한 중편소설 <슬픔의 노래>의 박운형이 그런 인물이다.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된 박운형은 자신이 저지른 폭력과 살인 행위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워한다. 그 고통을 박운형은 연극(예술)을 통해 견딘다.
5월 광주가 나에게 보여준 것은 인간의 저 캄캄한 영혼의 심연이었다. 장인하의 영혼 속에 박운형의 영혼이 있었고, 박운형의 영혼 속에 장인하의 영혼이 있었다. 장인하와 박운형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어딘가에서 홀로 떠돌고 있을 그들을 간혹 부르곤 했다. 장인하가 먼저 나타나기도 했고, 박운형이 먼저 나타나기도 했다. 때로는 둘이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그들은 서로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들 사이에 놓인 심연이 너무 깊었다.
지난 3월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두 사람의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5·18 당시 계엄군이었던 ㄱ과, ㄱ의 사격으로 동생을 잃은 박종수였다. 광주 차단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던 ㄱ은 남자 두명이 정지 명령에도 계속 도주하자 사격했고, 박병현(당시 25살)이 머리 관통상으로 사망했다. 그는 농사일을 도우러 고향 보성으로 가던 중이었다. ㄱ이 사망자의 신원을 알게 된 것은 2001년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사망자에게서 총기나 위협이 될 만한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하는 과정에서였다.
지난 1월 ㄱ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유가족을 만나 사죄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위원회가 “사죄는 공적 성격을 가져야만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고 ㄱ을 설득하자 처음에 당황했던 그는 위원회의 말에 공감하게 되어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가족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ㄱ이 “지난 4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면서 무릎 꿇고 사죄하자 박종수는 “용기 있게 나서줘 고맙다.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겠다”고 말하며 그를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계엄군이 유가족에게 직접 사죄한 것은 5·18 이후 처음이었다. “긴 시간 용서의 마음을 갖고 살아왔지만 누굴 용서해야 할지 몰라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는 박종수의 말은 역사가 품고 있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행위인지를 아프게 알린다.
우리에게 역사란 저쪽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이쪽의 세계이다. 저쪽 세계인 것은 지나간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쪽 세계인 것은 그것의 흔적이 지금, 여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시간의 허공이 가로놓여 있지만 우리는 흔적을 통해 저쪽을 들여다볼 수 있다. 흔적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저쪽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이쪽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 흔적을 구체적, 심미적으로 드러내어 이쪽과 저쪽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의 허공에 다리를 놓는다.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 음악감독으로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진 젊은 음악가 정재일의 신보 3집 앨범 <시편>(psalms)에서 이러한 예술의 가치가 확인된다.
<시편>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광주’의 역사적 기억이다. 지난해 장민승 작가와 작업한 5·18민주화운동 40주년 헌정 영상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중심에 두고 1979년 부마항쟁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의 역사를 사진 영상 문서 아카이빙으로 담아낸 작품 ‘둥글고 둥글게’가 <시편>의 줄기를 이루고 있다.
<시편>이 시선을 끄는 것은 앨범에 수록된 21곡의 표제가 모두 구약성서 시편과 연결되어 있는 점이다. 예를 들면 첫번째 곡의 표제 ‘26.9’는 시편 26장 9절의 “이 목숨을 죄인들과 거두지 마소서. 살인자들과 함께 이 생명을 거두지 마소서”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광주’라는 한국 현대사의 기억을 구약성서 <시편>의 세계와 융합시켜 인류의 보편적 기억으로 끌어올리려 한 정재일의 의도가 읽힌다. 이것을 위해 정재일은 중세 교회음악 아카펠라 형식과 현악 앙상블, 전자음향과 한국 소리꾼의 구음 등 서로 이질적인 소리들을 <시편>의 공간으로 끌어들여 섬세하게 섞어놓았다.
<시편>의 주제의식이 압축된 곡으로 평가받는 ‘메모라레’(memorare)를 듣는 동안 폴란드 작곡가 구레츠키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현대음악임에도 후기낭만주의 양식이 짙게 느껴지는 <슬픔의 노래>에는 세곡의 노래가 진주처럼 박혀 있다. 15세기경부터 폴란드 수도원에서 전해져오는 ‘성십자, 시편가 탄식’이라는 기도문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18살 소녀가 벽에 새긴 애절한 기도문,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애통해하는 폴란드 민요다. <슬픔의 노래>가 듣는 이의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드는 것은 전쟁과 학살을 끊임없이 겪어온 인류의 슬픔이 소리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소설 <슬픔의 노래>가 이 음악에서 시작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중세 교회음악의 색채에 싸인 구레츠키의 음조와 선율은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정재일의 표현에 따르면 그에게 아르보 페르트는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정재일은 음악 작업을 하면서 “몇년 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황망함, 아무것도 더하지 않고 그대로 올곧게 기억하고자 하는 모습들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재일의 <시편>에서 <슬픔의 노래>가 떠오른 것은 형태와 규모는 다를지라도 아우슈비츠와 광주는 역사라는 생명체 속에서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실핏줄이 미얀마로 뻗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지금 고통스럽게 목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