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로 자유를 얻은 언론이 민주주의의 바탕인 인권을 침해하는 역설은 민주주의의 어려움을 새삼 일깨운다. 사회공동체가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이유는 국민의 알 권리 때문이다. 국민의 알 권리를 훼손하는 언론의 자유는 존재 근거가 상실되는 것이다.
정찬 ㅣ 소설가
대중은 언론을 통해 세계를 읽는다. 언론은 대중이 거의 매일 읽는 유일한 ‘책’이다. 그런 행위 속에서 세계를 생각하고, 가치를 추구하고, 특정 집단과 관계를 맺고, 더 나아가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 행위를 한다. 이처럼 언론은 대중의 세계관 형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 여론을 만들어낸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론은 정당과 국가 정책 결정의 바탕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언론은 사회의 거울’이라는 표현이 오랫동안 회자되어왔을 것이다.
저널리즘의 첫째 의무가 진실 추구임을 누구나 받아들인다. 문제는 진실의 실체가 대단히 혼란스럽다는 데에 있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언론의 진실은 사실을 올바르게 ‘발견’하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한국 언론의 경우 사실을 보도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독재체제 시절에는 사실 자체가 진실이었다. 은폐된 진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 기자들이 진실을 밝히려다 해직되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언론학자들로 구성된 ‘허친스 위원회’는 “사실을 보도하는데도 결과적으로는 허위”인 기사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 경고는 사실이 진실로 다가가려면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사건과 취재원을 통해 기자가 보고 들은 것들은 정보의 더미일 뿐이다. 그 더미를 검증하고 분류하고 분류한 것들을 새롭게 배열하는 과정에서 사실이 왜곡되거나 허위로 변하기도 하고, 진실로 다가가기도 한다. 사실에서 진실을 찾는 과정은 일종의 여정이다. 그 여정이 투명하고 치열할수록 진실에 그만큼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러므로 기자는 고독한 여행자일 수밖에 없다. 기자의 영혼은 고독한 실존 속에 깃든다.
한국 언론은 민주화 운동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1987년 6월항쟁을 기점으로 새로운 환경과 마주했다. 독재체제의 와해로 사실을 넘어 진실로 다가갈 수 있는 길 위에 서게 된 것이다. 그 길은 가까우면서도 아득히 멀며, 부드러우면서도 험준하고, 환하면서도 늪의 심연처럼 캄캄하다. 진실이 은폐된 시절에는 진실의 모습이 단순하게 보였지만, 은폐된 진실의 문이 열리면서 진실의 모습이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33년 지난 지금 한국 언론은 이상한 형태로 길 위에 서 있다.
‘국경없는기자회’의 2020년 세계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 언론은 42위로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2006년 31위가 2016년에는 70위까지 추락했는데, 2017년부터 회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옥스퍼드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2020년 한국 언론 신뢰도는 조사 대상 주요 40개국 중 최하위다. 한국 언론은 자유지수는 높으나 신뢰도가 바닥인 기형의 모습인 것이다. 신뢰도가 낮다는 것은 ‘사실’이 왜곡되거나 ‘허위’로 변하는 기사들이 많음을 뜻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그중에서도 정파성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매체의 정체성과 이념성의 결과인 정파성이 특히 레거시 언론 중심으로 표나게 드러나면서 왜곡과 허위의 기사들이 급증하였고, 그 결과 ‘팩트체크’가 언젠가부터 일상의 용어처럼 되어버린 지경까지 이르렀다.
공동체의 언어는 유기체의 피와 같아 자연스럽게 골고루 흘러야 한다. 언론은 공동체의 중심 혈관이다. 이 혈관의 흐름이 막히면 다른 혈관들의 흐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언론의 정파성이 위험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파성의 심화는 언론기업의 사적 권력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민주화 이후 정치권력의 사슬에서 풀려난 언론이 자본권력에 예속되면서 사실에서 진실로 나아가는 길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이다.
레거시 언론에 속하는 <채널에이(A)> 법조 출입 기자가 금융사기로 복역 중인 기업인에게 검찰 고위간부와의 친분을 내세워 회유와 협박으로 여권 인사의 비위 사실을 받아내려고 한 ‘검·언 유착 의혹’ 사건이 충격적인 것은 한국 언론의 기형적 형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법조언론인클럽이 법조 출입 기자 99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과 검찰인사 평가에 각각 94%, 83.8%가 부정적이었고, 채널에이 사건 해당 기자의 취재 방식과 검찰의 채널에이 사건 수사 평가에 84.8%, 82.8%가 부정적이었으며, 공수처 설치에는 61.6%가 부정적이었다. 언론이 사회적 상황 속에서 숨 쉬는 생명체임을 생각하면 설문 결과가 낯설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하다. 국민 여론과의 괴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국민을 대상으로 한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60%대에서 80%대까지 높은 찬성률을 보였던 공수처 설치에 법조 기자 61.6%가 반대한다는 사실도 우려스럽지만, 채널에이 기자의 취재 방식에 84.8%가 부정적이라 했으니 나머지 15.2%는 그런 취재를 용인한다는 의사 표현인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법조언론인클럽의 조사 결과는 검찰 출입 기자들이 검찰권력과 부적절한 공생관계 속에 있으며, 검찰이 제공하는 정보와 발표를 최소한의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고 기사를 쓴다는 비판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이 비판을 기자들이 아프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검찰 편향적 보도가 검찰 수사를 받는 피의자 쪽 주장들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보호받아야 할 피의자의 인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민주화로 자유를 얻은 언론이 민주주의의 바탕인 인권을 침해하는 역설은 민주주의의 어려움을 새삼 일깨운다. 사회공동체가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이유는 국민의 알 권리 때문이다. 국민의 알 권리를 훼손하는 언론의 자유는 존재 근거가 상실되는 것이다.
사실이 지니는 가치와 진실의 무게가 가벼워지면서 말과 글들이 허공에 떠다니는 참담한 모습은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는 저널리즘의 위기”라는 월터 리프먼의 고전적 슬로건을 소환한다. ‘저널리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프먼이 언론인에게 완벽성과 정확성, 성실성을 요구한 것은 “허위의 가장 파괴적인 형태는 뉴스를 보도하는 이들에 의한 선동과 궤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언론은 리프먼이 지적한 “무질서의 가장 유독한 형태인 선동된 군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기자에게 언어는 생명체와 같다. 생명체는 목적의 존재다. 생명체가 수단의 존재가 되는 순간 생명체의 가치는 허물어진다. 언어가 타락하는 것이다. 언론의 정파성은 언어의 타락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언어의 타락은 기자의 영혼이 타락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언론의 정파성이 기자의 영혼과 그런 타락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언론의 타락이 무서운 것은 공동체의 언어를 타락시킴으로써 공동체를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