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오후 청와대에서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바이든 시대’ 개막을 앞두고, 중국 외교를 지휘하는 왕이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일본과 한국을 연이어 방문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 동맹을 규합해 중국에 대한 체계적 견제에 나서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일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사전 포석이다.
왕이 국무위원의 방한을 계기로 ‘시진핑 방한’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부쩍 높아졌다. 왕 국무위원은 26일 시 주석의 연내 방한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여건이 성숙하자마자 방문이 성사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방문의 여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기자들이 쓴 마스크를 가리키면서 코로나19 사태가 통제돼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부터 ‘시진핑 방한’ 카드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 이후 쌓여온 한-중 관계의 문제들을 한꺼번에 풀 수 있는 마법의 주문처럼 얘기되고 있다. 한국은 사드 갈등의 앙금을 털어내고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협상 재개를 위해 중국이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시진핑 방한을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위상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으려 하는 중국도 방한에 적극적이다.
코로나19와 바이든 행정부의 등장으로 시진핑 방한의 의미는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코로나19 대유행에 대해 중국의 책임을 묻는 여론이 전세계적으로 고조됐고, 미-중 경쟁의 양상도 변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식의 요란하고 낡은 무역전쟁이 아닌, 동맹들의 힘을 이용하고 금융과 첨단기술에 집중하는 ‘정밀 타격’으로 중국을 견제하려 할 것이다. 중국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 경제적 다자주의의 틀로 아시아 국가들을 끌어당겨 미국의 공세를 막아내려 준비하고 있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선, 시진핑 주석의 방한으로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기대를 낮추고, 한국이 중국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냉정한 판단과 전략을 점검해야 한다. 양갑용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바이든이 당선되면서, 미·중 모두에 한국의 전략적 위치가 올라갔다”며 “미국은 트럼프가 뒤흔든 동맹을 회복하기 위해 한국을 중시하고, 중국은 미국이 가치동맹으로 중국을 고립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의 역할을 주시한다”고 설명한다. 한국은 높아진 위상을 제대로 활용해 길을 넓혀야 한다. 지금 미국도 중국도 철저하게 미-중 관계를 중심으로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다. 중국이 바이든 행정부와 관계 개선에 나설 접점은 기후변화와 북핵 해결을 위한 협력을 꼽을 수 있다. 한국이 북핵 해법을 주도적, 체계적으로 마련해 이를 기초로 미-중이 북핵 문제와 관련해 협력의 공간을 넓힐 수 있도록 하면서 중국의 긍정적 역할을 이끌어내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이전보다 복잡해진 국제 정세의 체스판을 제대로 읽고 대비해야 한다. 중국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도 과도한 의존은 경계하고, 미-중이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는 혼돈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바이든 안보팀은 ‘이란 핵합의(JCPOA)’를 북핵 협상의 모델로 강조하고 있어, 이제 북핵 문제를 이란 핵문제와 미국 중동정책과도 함께 살피며 고차방정식으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청와대 외교안보팀도 미국·중국·일본·중동을 이해하는 전문가들을 두루 기용해야 한다.
중국에 대한 전략도 점검할 필요가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의 대중국 외교는 경제관계를 대폭 확대하되 안보 이견은 덮어두는 것이었다. 사드 갈등으로 이 길로는 더이상 갈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한-중은 안보 이슈에 대해서도 서로의 상황과 의견을 정확히 설명하고 원칙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사드 때처럼 문제를 계속 회피하다가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갈등을 악화시키는 일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
한국이 할 말을 제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다. 중국이 사드를 배치한 당사자인 미국에는 침묵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만 보복을 집중한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지난달 시진핑 주석이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항미원조’(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는 “미국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승리”라고 강조하면서 개전 당시 중국의 개입과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 데 대해, 한국은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중국이 애국주의를 부추기며 한국을 배려하지 않는 상황이 거듭되면, 한-중 관계의 토대도 흔들리게 된다.
박민희 ㅣ 논설위원 mingg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