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정찬의 세상의 저녁] 극장국가의 ‘최고 존엄’ 김정은 위원장의 변화

등록 2020-10-20 18:59수정 2020-10-21 02:07

페테르부르크 무대의 관객은 러시아 신민에 한정되었지만 평양 무대는 남북한을 넘어서서 전 세계 국민이 관객이었던 것이다. 그 장엄한 무대에서 ‘최고 존엄’이 한 말은 놀라웠다. ‘최고 존엄’의 무결성, 그 권력의 신성을 깨뜨리는 이 발언이 더 이상 ‘영도자의 신성한 카리스마’에 의지해 인민을 끌고 가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정찬 ㅣ 소설가

지난 10월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이 특별한 주목을 받은 것은 북한의 극장국가적 성격이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새벽 0시에 시작된 열병식은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스펙터클로 그날의 의미를 강렬히 부각시키면서 새로운 전략무기들을 공개했다.

‘극장국가’는 미국의 인류학자 클리퍼드 거츠가 19세기 인도네시아 제의정치와 권력의 스펙터클을 연구하면서 만든 개념으로, 일본의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는 이 개념을 김정일의 권력 승계와 연결시켜 북한의 정치구조를 들여다보았고, 한국의 인류학자 권헌익과 정병호는 그들의 저서 <극장국가 북한>을 통해 인류학적 관점에서 북한의 특수한 정치체제와 문화예술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1994년 7월8일 김일성의 죽음은 북한 사회를 정지시켜버릴 정도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1990년대 초반 소비에트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 와해로 공산권 국가들이 급격한 체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상황에서 식량 위기까지 덮쳐, 북한체제가 6·25전쟁 이후 최대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을 때 김일성의 죽음이 벼락처럼 떨어진 것이었다. 공산국가에서 최초로 세습권력자가 된 김정일의 입장에서 체제 유지를 위해 김일성의 절대적 카리스마가 간절히 필요했다.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다’는 서사가 북한의 공식 역사로 기록된 것은 당 내부 권력투쟁이 끝난 1960년대 말이었다. 그 이후 김일성 빨치산의 항일무장투쟁의 여정이 신성한 역사로 승화되면서 ‘인민을 이끄는 등불’이라는 상징이 인민들의 내면에 스며들었다. 그 등불을 향한 인민들의 그리움을 불러일으켜 김일성이라는 신성한 역사적 존재가 계속 살아 숨 쉬도록 하는 것이 김정일 체제의 당면 과제로 떠오른 것이었다. 김일성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전시함으로써 인민들이 그가 떠나지 않았음을 느끼도록 하고, 헌법을 고쳐 죽은 김일성을 ‘영구적이며 초월적인 최고 국가수반’의 자리에 올리고, 김일성의 위업을 상기시키는 대규모 건축물들을 세운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물질적 작업과 함께 혁명예술을 통한 정신적 작업도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시각적이며 미학적 영역인 집단예술 공연이었다. 김정일은 1970년대부터 북한 혁명예술의 중심인물이었다. 김일성의 죽음 이후 혁명예술의 역할이 한층 커짐으로써 북한에 내재된 극장국가의 성격이 표나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리랑> <꽃 파는 처녀> <피바다>를 비롯한 북한의 대표적 예술작품들은 식민지 시대 조선인 유랑민들이 고난을 견디며 김일성으로 상징되는 빨치산 지도자를 통해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감성적 영웅 서사가 북한의 체제 위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굶주리는 인민들에게 빨치산의 영웅 서사를 감정이입시켜 식민지 시대의 유랑민들이 그랬듯 기근의 고난을 견디며 희망과 승리의 등불로 나아가게 하는 체제 이데올로기적 효과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계몽 군주 표트르 대제는 극장국가의 개념을 도시 건축을 통해 구현하려고 한 최초의 권력자였다. 그는 유럽 최고의 건축가들을 불러들여 네바강 델타지대에 인공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새 도시로 옮겼다. 페테르부르크 건축미학의 구조적 본질은 극장이었다. 집을 짓고 거리를 만들고 광장을 조성하는 건축 순서를 뒤집어 광장을 먼저 만든 후 거리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 광장은 완전한 독립적 공간으로, 극장의 무대 역할을 했다. 전망은 극장의 특징이다. 어떤 객석에 앉더라도 무대가 한눈에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은 무대가 펼치는 세계를 볼 수만 있을 뿐 무대로 올라갈 수 없다. 무대는 관객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표트르 대제가 극장 구조의 페테르부르크를 통해 욕망한 것은 권력의 신성화였던 것이다.

북한에서 권력의 신성화는 김일성을 통해 이루어졌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신성을 후광으로 ‘유훈정치’를 했다. 김일성이 쌓아 올린 카리스마의 그늘에서 통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김정일의 운명이었다. 2010년 10월10일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일에 68세의 김정일과 26세의 김정은이 나란히 주석단에 서서 인민군을 사열했다. 그 광경은 김정일 권력이 김정은으로 승계됨을 대내외에 알리는 정치적 스펙터클이었다. 이듬해 12월 김정일의 사망으로 김정은은 세계에서 가장 젊은 국가지도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20년 10월10일 0시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장엄한 무대가 펼쳐졌다. 무대의 주인공은 ‘최고 존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었다. ‘최고 존엄’이라는 호칭에는 권력의 신성이 스며들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표트르 대제가 욕망한 신성한 권력의 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평양 무대는 페테르부르크 무대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엄청났다. 페테르부르크 무대의 관객은 러시아 신민에 한정되었지만 평양 무대는 남북한을 넘어서서 전 세계 국민이 관객이었던 것이다. 그 장엄한 무대에서 ‘최고 존엄’이 한 말은 놀라웠다.

“제가 이 나라를 이끄는 중책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노력과 정성이 부족하여 우리 인민들이 생활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 같고 바다 같은 우리 인민의 너무도 크나큰 믿음을 받아 안기만 하면서 언제나 제대로 한번 보답이 따르지 못해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최고 존엄’의 무결성, 그 권력의 신성을 깨뜨리는 이 발언이 놀라운 것은 더 이상 ‘영도자의 신성한 카리스마’에 의지해 인민을 끌고 가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체제의 구조와 성격이 많은 부분 세습권력에 의해 형성되어왔고, 그것이 극장국가의 모습으로 나아감으로써 북한 역사가 인민의 역사가 아닌 권력의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 역사가 사회주의 국가의 와해 속에서도 북한 체제가 무너지지 않았던 요인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지만, 사회주의의 겉모습만 남아 있을 뿐 사회주의의 실질적 모습은 잃어버린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 사실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했다면 위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어 그는 “악성 비루스와 싸우는 세계인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함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 후 “사랑하는 남녘의 동포들에게도 따뜻한 이 마음을 정히 보내며 하루빨리 이 보건 위기가 극복되고 북과 남이 다시 두 손을 마주 잡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런 그의 말들은 적잖은 사람들로 하여금 북한이 ‘새로운 역사’의 길로 나아가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어쩌면 그 길만이 김정은 위원장의 유일한 선택이자 운명일지도 모른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