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처음 대답하는 사람이 중요해요. 강○○!” “예.” “아니, ‘예’ 말고 ‘응’이라고 해봐요. 겁내지 말고.” “…… 응.” “잘했어요. 거봐요. 할 수 있잖아요.”
나는 출석을 부를 때 학생들에게 반말로 대답하라고 ‘강요’한다. 괴팍하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이지만, 잔재미가 있다. 그러다가 스무 명쯤 지나면 강도를 한 단계 높인다. “평소에 엄마 아빠가 부르면 뭐라 했는지 생각해서 대답해 봐요. 자, 용기를 내요. 박○○!” 머뭇거리며 답한다. “왜!!”(내키는 대로 해보라고 하면 가끔 간이 많이 부은 학생이 ‘오냐’라고 해서 응급실에 보내기도 한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수업에서 반말로 대답하는 걸 갈고닦아 딴 강의에서 엉겁결에 ‘왜’라고 하여 낭패를 당했다는 미담을 듣는 것입니다. 낄낄낄.”
말은 명령이다. ‘예’와 ‘응’과 ‘왜’를 언제 써야 하는지 가르친다. 어기면 돌을 씹은 듯이 불편해한다. 그래서 ‘반말 놀이’는 규율을 깼다는 짜릿한 해방감도 느끼게 하지만,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명령의 체계(말의 질서) 속에 내가 던져져 있음을 무겁게 확인하게도 한다. 다만 말이 만든 경계선을 놀이처럼 한 번씩 밟고 넘어감으로써 그 질서를 상대화한다. 말은 피할 수 없으니 더욱 의심해야 하는 질서다.
부풀려 말하면 선생에게 ‘왜’라고 답해본 학생들은 시대에도 항의할 수 있다. 그러니 긴장들 하시라. 말에 속지 않고 ‘왜? 왜 그래야 되는데?’라며 달려드는 젊은이들이 해마다 속출할 것이다. 권력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상상력에 뿌리박은 채, 야금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