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8호 태풍 바비가 지나가고 9호 태풍 마이삭이 다가오기 전 오른 한라산 백록담에 물이 차 있다. 최우리 기자
결혼 예정일은 벚꽃이 피는 올해 4월이었다. 그러나 3월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계속 늘면서 식을 미뤘다. 식장에서는 식을 취소하지 않는다면 윤달인 6월, 장마인 7월, 한여름인 8월 중 어느 하루를 골라달라고 했다.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결혼식장까지 발걸음을 해야 하는 하객들을 배려해 비 오는 날만큼은 피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기상청 누리집에 접속해 지난 30년 동안의 중부지방 장마 기간부터 확인했다. 확인 결과 장마는 통상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이어졌다. 어린이집이나 관공서의 휴가 기간이자 한해 중 가장 무덥다는 8월 초도 피하기로 했다. 8월 말이 본능적으로 끌렸다. 내 몸이 기억하는 8월 말은 광복절을 계기로 더위가 한풀 꺾인 뒤 점차 하늘이 높아지고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새 출발을 하기 적당히 설레는 날씨였다.
그럼에도 불안한 지점은 남아 있었다. 한반도의 8월 말과 9월 초는 태풍의 시간이다. 여행을 가지 않으려고도 했지만, ‘신혼여행은 가야 그 추억으로 평생을 버틸 수 있다’는 선배들의 조언에 제주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뒤였다. 만약 태풍이 오면 바다 구경도 못 하고 최악의 경우 비행기를 타지 못할 수도 있어 걱정된다는 내게, 새 동거인은 “미리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은 하지 말고, 태풍이 오면 그때 걱정하자”고 나를 토닥였다.
채점 결과 점수는 50점 또는 0점이었다. 식 당일은 아침부터 잔뜩 흐리더니 축가를 부르는 순간 ‘쾅’ 하는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쏟아졌다. 다년간 도시농부로 단련된 ‘날씨 덕후’인 내게 몸이 기억하는 계절감은 꽤 높은 신뢰도를 자랑하는데, 비를 피하겠다며 통계까지 동원해 머리를 써보았지만 비를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게다가 원치 않았던 태풍과의 만남은 성사됐다. 다만 일주일 사이 두개의 태풍(바비, 마이삭)을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숙소에서 술이나 마셔야겠다고 했지만 10여m 떨어진 편의점에 술을 사러 가려고 현관문을 열었다가 성인 남녀가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든 비바람에 조용히 문을 닫아야 했고, 곧이어 숙소가 정전돼 두려움에 떨며 잠을 청했다. 태풍이 뿌리고 간 비 덕분에 청록빛 한라산 백록담과 같이 평소 보기 힘든 자연 그대로의 제주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어 좋은 점도 있었다.
태풍이 지나고 나면 가을이 속도를 낸다. 그러나 올가을 날씨 역시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은 한해 내릴 비의 절반가량이 여름에 온다. 봄과 가을에는 각각 그 절반이, 겨울은 가장 적게 비가 내린다. ‘가을비는 장인의 나룻 밑에서도 긋는다’는 속담은 가을비는 장인의 턱수염 아래서도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 양이 적고 짧게 내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난해 계절별 강수량 통계(기상청 기상연보)를 보면 전국적으로 여름(6~8월)이 493㎜, 가을(9~11월)이 448.3㎜로 이례적으로 여름에 비가 적었고 가을에 그 양이 많았다. 여름은 평년과 비교해 그 양이 68%에 그쳤고 가을은 171%에 달했다. 가물었던 2017년 가을에는 170㎜밖에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2016년에는 여름 446㎜, 가을 381㎜로 두 계절 사이의 강수량 격차가 적었다. 마치 전년도에 치른 모의고사나 기출문제 족보가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수험생이 된 기분이다.
이 시국에 결혼식을 마쳤다는 ‘안도감’과 결혼을 해버렸다는 ‘현타’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가을과 함께 새 출발선에 섰다. 기상청이 일일 날씨를 수치로 기록하고 있지만, 결혼도 했으니 초등학생 때처럼 생생한 날씨 일기를 써보려 한다. 기후변화를 기록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변화도 앞당겨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최우리 ㅣ 사회정책부 기후변화팀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