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의사의 권위는 학생 때 공부 잘했고 돈 많이 버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 그 이유의 전부일 때가 많다. 이번 코로나 유행 때 의료인에 대한 전국민 감사운동을 스스로 뒤집어 버린 자충수가 더욱 가슴 아픈 이유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는 제우스의 벼락을 맞아 죽었다. 기원전 1800여년 전 바빌로니아에선 수술 중 환자를 죽이면 의사의 손목을 잘랐다. 200년 전 독일에서 의사는 빨래꾼, 도축업자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 조선시대에도 양반은 의사가 되지 않았다. 이랬던 의사가 현재와 같은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된 경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번째는 지배 권력과의 담합이다. 대표적인 것이 의사에게만 독점적인 진료권한을 주는 것이다. 오래된 간접 담합도 있다. 그 예가 파스퇴르다. 그는 결핵의 원인이 결핵균이라 주장함으로써 당시 지배 권력의 지지를 받아 승승장구했다. 반면, 결핵이 열악한 노동조건과 영양실조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페텐코퍼는 끝내 자살했고 교과서에 실리지 못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일개 의원이 대학교까지 거느린 거대 종합병원으로 성장한 것이 정부의 뒷배 없이 가능했을까? 의약분업 전까지 한국 의료계는 낮은 의료보험 수가를 유지하는 대신 리베이트를 눈감아주는 정부와 의료계의 담합 속에 성장했다. 현재도 정부는 부대사업 확대, 바이오헬스 지원 등 의료영리화 정책으로 의료계에 특혜를 부여하고, 의료계는 고위 관료 출신의 교수 채용, 공짜 진료 등 다양한 보상을 계속해오고 있다. 2000년 의약분업 싸움도 결국 수가 대폭 인상이라는 담합으로 끝나지 않았던가?
두번째는 의사 스스로 키워온 권력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플렉스너 보고서다. 이를 통해 의학 교육과정의 표준화와 질 관리 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에 더해 도덕적 자율규제를 강화해 나감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쌓아 나갔다. 이는 자기 뼈를 깎는 힘겨운 과정이었다. 독일 의학의 황제 루돌프 비르효도 평생 의사의 지위 향상을 위해 싸웠지만 “의사는 가난한 자의 천부적 옹호자”여야 한다는 주장을 끝까지 고수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의사 사회는 두번째 경로를 통한 권위의 확보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서구 사회가 이룩한 권위를 별 대가 없이 물려받아 국민에게 존경받는 전통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 물론 헌신적 노력을 경주했던 의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난한 환자를 위해 자기 병원 뒷문을 열어 놓았던 의사, 먼 아프리카 오지에서 한센병자의 손을 잡아주던 의사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서 의사의 권위는 학생 때 공부 잘했고 돈 많이 버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 그 이유의 전부일 때가 많다. 이번 코로나 유행 때 의료인에 대한 전국민 감사운동을 스스로 뒤집어 버린 자충수가 더욱 가슴 아픈 이유다.
현 한국 사회로 돌아와 보자. 최근 의사협회가 파업을 선언했고 젊은 의사와 의대생도 합류하는 양상이다. 모든 집단은 파업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파업이 우려되는 것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유행으로 온 국민들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을 만한 대안적 주장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난 의약분업 때와 마찬가지로, 일반 시민이나 의견을 달리하는 의사의 목소리는 들어갈 수 없는 폐쇄적 네트워크 속에서, 자기끼리만의 확신이 증폭되어 만들어 낸 선정적이고 근거 없는 이야기가 횡행하고 있다. 최근 공공재 논란도 그중 하나다. 의료가 공공재적 성격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다. 민주적 공공성에 복무함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무엇보다 의사를 비롯한 전문가의 특혜는 이것에 근거한다.
의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권위를 획득하고 유지해 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의사들의 몫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젊은 의사와 의대생이다. 의사 수 늘리는 것이 싫어 의사시험 거부와 유급을 하겠다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싸우려거든 기성세대 흉내 내지 말고, ‘청년다운 명분’으로 청년답게 싸웠으면 좋겠다. 그간의 무관심에 대한 반성도 하고, 정부안을 뛰어넘는 의료 공공성 강화 방안도 제안하고, 무엇보다 불안에 떨고 있는 중환자실 가족들도 지지할 싸움을 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그러지 않고 싸움에서 이길 방법이 있냐고 되묻고 싶다. 기성 의사들은 학생들 부추기지 말고 “싸움은 우리가 할 테니 너희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품위라도 보여주길 바란다.
젊은 의사와 의대생에게 미련을 가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누구처럼 자신의 정치적 야심 때문에 크레인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오랜 단식으로 스러져 가는 고공농성자를 돌보겠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높은 크레인과 굴뚝에 오르는 젊은 의사들의 얼굴이 떠올라서다. 또한 얼마 전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기도 하다.
“교수님! 저 국립중앙의료원(공공병원) 전공의 합격했어요.” “축하해. 이제 많이 힘들겠네.” “아니에요, 가난한 환자가 많아서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