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리 ㅣ 기후변화팀 기자
비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스마트폰을 집어 ‘날씨’ 두 글자를 입력한다. 도시 직장인의 일상은 이렇다 할 감동이 없다. 그래도 어제와 날씨가 다르다면 조금은 색다른 하루를 살 수 있다. 일년, 한달, 하루하루 서로 다르고 또 같은 날씨는 자연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일일 이벤트다. 아침마다 그날의 날씨를 검색할 때마다 또 어떤 선물을 받을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날씨를 검색하는 주된 이유는 비가 오는지 알기 위해서다. 무슨 옷을 입을지, 어떤 신발을 신을지, 무슨 교통수단을 이용할지, 무엇을 먹을지는 비가 결정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어두운색 하의와 실리콘 재질의 샌들 또는 운동화를 신는다. 퇴근길에는 창밖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고 싶어 괜히 버스를 탄다. 날생선을 먹는 회식은 피하고, 맥주를 좋아하지만 막걸리를 주문한다. 출퇴근 시간을 중심으로 시간당 강수량 20㎜ 이상의 많은 비가 내리는 날에는 평소 가방에 넣고 다니던 5단 우산을 꺼내놓고 장우산을 들고 나간다. 아마도 당신의 하루도 이럴 것이라고 예상한다. 비는 언제나 그날의 우리 의식과 행동을 지배했다. 그래서 비가 안 온다던 기상청 예보가 틀리면 그렇게 화가 난다.
비 칼럼을 맡아서가 아니라 사실 비 오는 날은 매력적이다. 하늘을 가린 우산 위로 ‘후두두’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방울은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도시의 소음을 잠재워준다. 이렇게 빗소리만 가득한 날이면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만이 들리는 어느 외국의 공항에 놀러 온 듯하다. 빗소리가 마음속에 박힌 뾰족하고 날카로운 말들을 씻어내려 줄 것만 같다. 우산 아래 혼자 서 있을 때는 우산 크기의 캡슐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드는데, 투명한 막이 세상과 나를 구분해주는 것 같다. 내 땅은 아니지만 이 공간만큼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양봉장의 벌과 숲에 사는 새도 살아남기 위한 먹이 활동을 멈추고 잠시 쉬고 있을 테니 흐뭇해진다. 비가 오면, 직장 생활을 하면서 빠르게 잃어버린 차분하고 감수성 충만했던 내 모습과 마주할 수 있어서 좋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비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날씨는 기억을 재생하는 능력이 탁월한데 비도 그렇다. 나는 왜 비만 오면 그날의 너가 생각이 나는 걸까. 비 오는 날이면 짜증을 내는 너와 기분이 좋은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또 비와 관련한 노랫말과 영화는 왜 이리 많은지, 화투패의 ‘비광’ 그림 속 남자는 왜 우산을 들었는지, 2008년 2월10일 밤 남대문이 불 속으로 사라질 때 왜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았는지, 빗물로 돈을 버는 방법은 없는지 등이 궁금하다. 30년 뒤에는 가뭄과 집중호우만이 남아 국어사전에서 ‘장마’라는 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평소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지만 자연은 힘이 세다. 기후위기로 어느 지역은 폭우가 내리고, 또 다른 지역은 가뭄이 들고 고온이 이어져 산불이 난다. 이런 변화가 심화될수록 변화무쌍해지는 우주의 시간 앞에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한껏 성난 지구의 구름이 문명에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한겨레> 독자들은 구름 위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물을 양동이로 들이붓는지 장대비가 쉬지 않고 쏟아지는 날이면 저지대에 사는 이웃을 걱정하는 ‘착한’ 독자일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비가 내려 잠시 세상이 멈춰버렸으면 하고 바라본 적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당신이 이 글을 읽어주면 더욱 좋겠다. 비도 오고 그래서 옛사랑 생각도 하고 기후위기 문제도 고민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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