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급을 검토하고 있는 생활지원금 대상에서 ‘외국인’을 제외하라는 의원이 있다. ‘외국인’도 납세자고 사회의 불가결한 구성원인데. 생활보호 수급자도 제외하라고 트위터로 발신하는 ‘작가’가 있고, 이에 대해 10만건이나 되는 ‘좋아요’가 달렸다. 이럴 때는 알기 쉬운 차별일수록 더 많은 지지를 얻는다. 이런 정치,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역병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재앙이다.
피터르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 최재혁(예술도서 번역·기획편집)씨 제공
플랑드르 지방(지금의 벨기에)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1525?~1569)에게는 <죽음의 승리>라는 제목의 대작이 있다. 제작 연도는 1562년께로 추정된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죽음’의 군세(軍勢·군대 세력)는 용서 없이 인간들을 덮치는데, 그 맹위 앞에는 왕후장상도 고승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멀리서는 화산이 불을 뿜고 탑이 타오르며, 바다에서는 배가 불에 타 침몰하고 있다. 언덕 위에서는 온갖 방법으로 사람들이 처형당하고 있다. 여기에 그려져 있는 세계는 과연 500년 전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인가. 요즘 내 뇌리에는 이 그림의 영상이 들러붙어 있다. 그리고 인간 사회는 결국 좋아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계속 떠오른다.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오늘은 4월1일이다. 일본에서는 새 회계연도가 시작되는 날로, 보통은 각급 학교에서는 입학식, 회사에서는 입사식이 열린다. 그러나 올해는 사회 전체를 짓누르는 불안감이 뒤덮고 있다. 내가 일하는 대학에서는 입학식이 취소됐다. 물론 ‘신종 코로나 감염’ 사태 때문이다. 이날 시점에서 전 세계의 감염자 수는 74만명을 넘겼고 사망자 수도 3만6천명이 넘었다. (그 이틀 뒤 감염자 수는 100만명을, 사망자 수는 5만명을 넘겼다-역주) 일본에서는 감염자가 2천명 남짓이고, 사망자는 57명이지만, 이 수치는 앞으로 급속히 늘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염의 대만연과 의료 붕괴로 인한 집단적 패닉(공황)이 전 세계에서 진행된다. 뉴욕이나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참상은 충격적이다. 로마나 파리의 도시 풍경은 내게는 친숙한 것이지만 지금은 그 어디에도 사람이 없다. 스페인에서는 장례식이 금지됐다. 인터넷에는 뉴욕의 어느 병원에서 다 수용하지 못한 주검을 냉장 설비가 된 대형 트럭으로 운반하는 동영상이 떠 있다. “촬영하고 있는 사람의 손이 떨리고 있다. 그는 울고 있다”는 멘트가 붙었다.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페스트 재난 그것을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14세기 중반에 유럽 전역을 페스트가 뒤덮었다. 유효한 치료법도 없이 현세의 어떤 지위나 무력도 부도 의미를 잃었고, 모든 계급의 사람이 죽어가는 정세 속에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경구를 입버릇처럼 되뇌게 됐다. 하지만 브뤼헐의 걸작은 단지 자연재해로서의 역병만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쟁의 은유다. 당시 플랑드르는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강국들이 쟁탈전을 벌이던 전장이기도 했다. 늘 그렇지만 재해와 역병은 그 단독으로 사람들을 덮치진 않는다. 그 고통과 비극을 인간 자신이 배가시키는 것이다. 재해에는 전쟁이 뒤따른다.
나는 이번 4, 5, 6월에 각각 한 번씩 심포지엄이나 강연 일로 한국에 다녀올 예정이었으나, 그것도 모두 취소됐다. 그중에서 5월에는 내가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해마다 인천에서 열리는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갈 예정이었다. 영화제를 앞두고 실행위원회의 요청으로 젊은 세대 지식인인 이종찬 선생과 뉴스레터에 공개하는 것을 전제로 서신을 교환했다. 2월 초에 이종찬 선생한테서 받은 제1신의 타이틀은 ‘마스크로 평등해진 사회’였다. 이 흥미로운 타이틀에 자극받아 나는 2월25일에 답장을 썼다.
이종찬 선생의 비유를 흉내내자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지구상의 인류 모두가 마스크를 쓴 채 사멸해가는 모습이다. ‘평등화’라고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 마스크조차 손에 넣을 수 없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3월31일 마스크를 쓰고 국회 질의에 답변하면서 국민 전체 세대에 재이용할 수 있는 면마스크를 2장씩 배포하겠다고 말했다. 마스크 2장이라니! 이것이 이 위기에 직면한 일본 정부의 “전례 없는” “대담한” 시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농담이라 여기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아니다.
앞으로는 약자들이 치료도 만족스럽게 받을 수 없는 불평등이 점점 확대될 것이다. 손 씻을 물조차 부족한 아프리카 등 발전도상국 사람들에게 닥쳐올 재앙을 상상해보자. 호화 여객선이 침몰할 때 승객들은 평등하게 희생당하는 것이 아니다. 구명보트에 가장 먼저 탈 수 있는 1등선객과 배 밑바닥에 갇혀 있는 3등선객은 불평등하게 희생당한다.
나중에 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뒤돌아볼 날이 올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더 끔찍한 대재앙의 서막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대재앙’이란 전염병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 혼란 속에서 자기중심주의와 불관용 정신이 만연하고 파시즘이 대두하는 사태를 가리킨다. 이미 헝가리 등 권위주의적인 정권이 지배하는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그런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민주적인 절차들이나 인권 원칙이 비상시 대처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본말 전도의 주장들이 제기된다. 아베 총리는, 수많은 비리와 부정의 책임을 지고 사임해야 한다는 비판에 대해, 코로나 대책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정권을 버릴 생각이 없다고 답한다. 재해나 역병까지도 권력 연명에 이용하려는, 너무나도 노골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정부가 지급을 검토하고 있는 생활지원금 대상에서 ‘외국인’을 제외하라는 국회의원이 있다. ‘외국인’도 납세자고 사회의 불가결한 구성원인데. 생활보호 수급자도 제외하라고 트위터로 발신하는 ‘작가’가 있고, 이에 대해 10만건이나 되는 ‘좋아요’가 달렸다. 이럴 때는 알기 쉬운 차별일수록 더 많은 지지를 얻는다. 이런 정치,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역병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재앙이다.
역병이나 자연재해로 인간은 생활이나 목숨을 빼앗기지만, 실은 인간은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익이나 권력에 홀린 인간들에 의해. 그리고 사고 정지 상태로 그 사태를 방관하는 인간들에 의해. 도쿄올림픽 1년 연장이라는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선택이 일본 사회에서 환영받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이 바로 그 좋은 예다.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는 500년도 더 전에, 인간이 진보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죽음’은 승리할 것이며, ‘죽음’에는 저항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에는 저항할 수 없을지라도, 인간의 ‘불의’에는 마지막까지 저항할 작정이다.
서경식ㅣ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ㅣ독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