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기억에는 ‘의미기억’과 ‘사건기억’이 있다. 의미기억은 ‘나무에는 뿌리가 있다’는 식으로 별 맥락 없이도 저장되는 일반 지식이다. 사건기억은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기억이다. 감각, 감정이 함께 저장된다. 싸리나무로 만든 칼로 놀던 모습, 사다리에서 추락하면서 느낀 공기의 촉감 같은 것들이다. 기억은 언어를 넘어선다. 모든 감각과 감정이 동원된 것이라 톡 건들기만 하면 와르르 쏟아진다. 예고되거나 꾸준하지 않고 ‘불쑥’ 떠오른다. 옥상에서 담요를 안고 오다가 맡은 엄마의 등짝 냄새 같다.
‘기억’을 말로 표현해보면 정확하게 복원되지 않는다. 서류처럼 펼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매번 지금 내 상황과 연결해 다시 경험하고 재구성한다. 타인의 증언으로도 쉽게 수정된다. 인과관계가 달라지고 평가와 의미도 변한다. 기억은 변한다. 그래서 불행하거나 불우한 기억마저 어떤 언어로 기억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결국 기억은 말을 넘어선 문제이기도 하고 말의 문제이기도 하다.
돌림병이 다시 알려주었지만, 우리는 이미 죽음을 앞뒤에 모시고 산다. 우리는 길 잃은 연약한 존재이다. 죽음이 두려우니 죽음에 대한 의례가 가장 많다. 아기들도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분하고 달리 대한다. 놀랍게도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노래와 시와 그림과 춤을 만들어내도록 진화해왔다. 죽음은 개인이 당면해야 할 일이지만 개인에게 모든 걸 맡기지 않는 것, 죽음에 대해 말함으로 죽음을 뛰어넘는 것, 그게 연약한 인간의 본성이다. 연약한 사람들이 하는 일은 기억과 연대, 그리고 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