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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찬의 세상의 저녁] 코로나19 팬데믹과 인류의 질문

등록 2020-03-26 18:22수정 2020-03-27 02:39

정찬 ㅣ 소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계를 뒤덮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경제 팬데믹을 불러들이고, 경제 팬데믹은 모순의 누적으로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자본주의의 몸통을 강타하고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인류는 전체주의적 감시체제와 시민적 역량 강화 사이, 민족주의적 고립과 글로벌 연대 사이에서 두가지 힘들고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체주의적 감시체제와 민족주의적 고립에서 벗어나 시민적 역량 강화와 글로벌 연대를 인류에게 호소한 것이다. 이 보편적 호소를 누가 반박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인류가 이런 보편적 호소를 숱하게 들어왔음에도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거나 실천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아우슈비츠’를 겪은 후 인류의 통렬한 반성과 성찰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학살과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이 자기들의 국가를 세우고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또 다른 형태의 아우슈비츠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희생자가 가해자로 변하는 이 참혹한 순환의 고리가 인류의 숙명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창궐할 때 한국인을 비롯한 세계인들은 타자의 시선으로 우한을 바라보았다. 그 바이러스가 한국의 대구에서 급속히 번져나갈 때는 한국 바깥의 세계인들이 타자의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았다. 바이러스가 이탈리아를 휩쓸면서 유럽 대륙은 물론 미국도 바이러스 창궐 영역으로 확인되자 세계인들은 비로소 타자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 혹은 ‘우리’의 시선으로 신종 전염병을 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현상이다. 코로나19가 팬데믹이 되기 전까지 인류는 타자의 시선 안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인간 속에 내재한 ‘이기적 자아’ 때문이었다. 인간의 이기적 자아는 끔찍한 전쟁 앞에서도 쾌락을 느낄 정도로 기괴하다.

1991년 1월16일에 시작되어 2월28일 종료된 걸프 전쟁에서 미국은 이라크에 8만85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에 투하한 핵폭탄의 일곱배를 웃도는 양으로 44일의 전쟁 기간 동안 민간인 희생자만 20여만명에 달했다. 세계인들은 티브이(TV)를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폭탄이 연출하는 스펙터클을 감상했다. 적외선으로 촬영한 야간 폭격과 패트리엇 미사일의 격추 장면 등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티브이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폭탄에 장착된 카메라는 보는 이의 시선을 폭탄의 시선으로 변화시켜 하이퍼테크 폭격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적 즐거움을 증폭시켰다. 인간의 시선을 기계의 시선으로 바꾸어버린 놀라운 과학기술은 전세계인을 게이머로 만들었다. 폭격을 수행하는 이들조차 비디오게임에 빠진 아이로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폭탄과 달리 대상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파고들어가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이런 미증유의 위기 속에 역설적으로 희망의 씨앗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은 신비롭다. 바이러스 팬데믹이 타자의 시선이라는 이기적 쾌락에 갇힌 인류에게 감옥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문이 열렸다고 해서 그 안에 갇힌 사람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을 모르는 사람은 문이 열린 사실조차 모를 것이며, 그 안을 편안히 느끼는 사람은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문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시력이 사라지는 전염병이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휩쓸면서 도시 전체가 아비규환으로 변해가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류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온다. 작가가 ‘눈먼 자들’ 속에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는 인물을 만들어 그로 하여금 눈먼 자들이 할 수 없는 역할을 하게 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늘 죽음을 나타내던 상징이 삶의 상징이 되어버렸다”고 말하게 한 것은 암흑에 갇힌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환한 생명체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팬데믹에 갇힌 인류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눈먼 자들의 도시’에 살기 시작했을까?”라는 간절하고도 치열한 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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