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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하루아침에 / 김진해

등록 2020-03-22 18:17수정 2020-03-23 09:30

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다. 마스크 없이 버스 타기 꺼림칙하고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거리는 스산하고 사람들은 흩어졌고 형이 죽었다. 이전과 이후가 달라졌고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바쁘다. 일이 닥치고 나서야 ‘여기는 어디?’라고 묻는다. 조짐이 왜 없었겠냐마는 직전까지 모르다가 하루아침에 당했다고 착각한다. 물론 엄청나게 긴 시간을 뜻하는 ‘겁’(劫)이란 말도 안다. 천지가 한번 개벽할 때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사이. 가로세로 40리나 되는 큰 바위를 백년에 한번씩 얇은 옷으로 스쳐 마침내 그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짧은 시간을 표현하는 말이 많다. ‘찰나’(刹那)는 75분의 1초. 이게 얼마나 짧은지 실을 잡아당겨 끊어지는 순간이 64찰나나 된다. ‘순식간’은 눈 한번 깜박이고 숨 한번 쉬는 사이다. ‘별안간’은 스치듯 한번 보는 동안이고, ‘삽시간’은 가랑비가 땅에 떨어지는 사이다. 아찔할 정도로 빠르다. ‘갑자기, 졸지에, 돌연, 홀연, 각중에, 느닷없이’ 같은 말도 어떤 일이 짧은 시간에 뜻밖에 벌어졌다는 느낌을 담는다.

그에 비해 ‘하루아침’은 숨이 덜 차다. ‘찰나, 순식간, 별안간, 삽시간’이 시간의 한 지점을 수직적으로 지목한다면, ‘하루아침’은 그걸 조금이나마 수평적으로 펼쳐놓는다. ‘찰나’나 ‘영겁’에 비해 ‘하루아침’은 시간의 질감이 느껴진다. 찰나에 서 있는 인간에게 ‘하루아침’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알아차릴 수 있는 과분하게 여유로운, 그만큼 미련이 남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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