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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혜진, 노동 더불어 숲] 마사회를 믿을 수가 없어서

등록 2020-02-20 18:29수정 2020-02-21 13:34

김혜진

노동 더불어 숲

“혹시나 해서 복사본 남긴다. 마사회 놈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부산경남 경마공원에서 일하던 문중원 기수가 유서 마지막에 자필로 남긴 글이다. 세장짜리 유서에는 몸이 아파도 말을 타야 했던 기수들의 삶,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말을 탈 수 없었던 고통, 미래를 위해 조교사 자격증을 땄지만 ‘높은 분들에게 잘 보이지 않아’ 마방 대부심사에서 탈락한 울분이 담겨 있다. 문중원 기수는 마사회가 이 죽음조차도 왜곡할 것을 우려하여 유서의 복사본을 남겼다. 지난해 11월29일의 일이다.

부산경남 경마공원에서 일하는 기수와 말관리사는 300명이 채 안 된다. 그런데 지난 14년간 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상적인 기업이 아니다. 죽음의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제도 개선, 유가족 위로금을 두고 마사회와 공공운수노조 간에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결렬된 지 벌써 한달이 다 되어간다. 교섭 결렬의 핵심 쟁점은 책임자 징계였다. 문중원 기수의 유서에는 부당행위자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마사회는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으니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책임자를 징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기수와 말관리사들은 수시로 징계를 당해왔다. 경기 때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은 것 같다고 ‘재결위원회’에 불려가서 소명도 못 하고 며칠간 출전정지를 당하는 일도 있다. 비리 혐의에 대해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품위유지 위반’으로 다시 징계를 받은 기수도 있다. 경마하는 날도 아닌데 경마장 밖에서 두 명의 말관리사가 다퉜다는 이유로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소명 한번 제대로 못 한 채 징계를 당해왔던 기수나 말관리사 입장에서 ‘수사 결과가 나와야 징계할 수 있다’는 마사회의 주장은 얼마나 허망한가.

문중원 기수가 숨진 뒤 공공운수노조는 기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기수들은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면 말을 태우지 않으니 거부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그러자 마사회는 경마 부정을 밝히겠다며 기수들에게 출석을 통보했다. 마사회 시행규칙에 의거하여 전화통화 기록과 통장 사본도 제출하라고 했다. 응하지 않으면 징계하겠다는 협박도 빼놓지 않았다. 문중원 기수가 목숨을 걸고 고발한 마사회 직원은 징계할 수 없는데 기수들은 조사하겠다 하니, 기수들의 입을 막기 위한 징계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기수와 말관리사에게는 징계권을 휘두르는 마사회지만, 정규직 직원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다. 2017년 부산경남 경마공원에서 두 명의 말관리사가 목숨을 끊은 뒤 고용노동부는 특별근로감독을 했다. 5년간 62건의 산재 은폐가 발견되고 형사처벌도 이어졌다. 하지만 정규직 책임자는 징계를 받지 않았다. 인사규정에 구체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이란다. 2019년 국정감사에서 밝혀진바, 최근 5년간 88명의 마사회 직원이 성희롱과 일터 괴롭힘,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었다. 대부분 근신, 견책, 감봉의 경징계였고, 비정규직 4명만 면직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수사 결과가 나오더라도 문중원 기수 죽음의 책임자를 제대로 징계할지 의문이다.

마사회는 공공기관이다. 연매출이 7조8천억원이나 된다. 도박중독의 폐해와 부정경마를 막기 위해 정부는 마사회를 공공기관으로 운영하며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다. 그런데 마사회는 기수, 말관리사들과 고용계약의 형식을 없애버림으로써 모든 책임을 회피했다. 징계의 권한은 휘두르지만 죽음에 대한 책임은 질 수 없다 한다. 그러면서 내부 직원의 비위와 비리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다. 그러니 갑질이 횡행하고 마사회 직원들이 비리에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힘없는 기수와 말관리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부당한 현실을 증언해왔다.

2월22일 ‘죽음을 멈추는 희망버스’가 광화문에 있는 문중원 기수의 분향소를 향해 달린다. 말관리사와 기수들이 더는 죽음으로 호소하지 않도록 시민들이 나서고 있다. 정부가 답해야 한다. 공공기관 마사회를 죽음으로 고발한 문중원을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편집자: 칼럼 마감 이튿날, 22일 예정된 희망버스는 코로노19 확산으로 연기 결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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