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이름을 안다는 건 애정의 문제다. 나처럼 회색도시에서 자란 사람은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분하지 못한다. 처제의 고양이가 페르시안이란 것도 오늘 알았다. 무디고 무정하면 ‘꽃’이나 ‘고양이’ 정도로 세상을 성기게 기억한다.
추상은 공통점을 찾으려는 마음의 습관이다. 감각도 추상을 거친다. 다른 감각은 신경세포에서 느낀 감각을 시상(視床)이라는 중계장치를 거쳐 대뇌에 전달하는데, 후각만이 중계장치 없이 바로 전달한다. 게다가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와도 연결되어 있어서 감정과 기억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딴 감각보다 냄새가 오래 기억나는 이유다.
이러한 후각의 직접성 때문에 냄새를 언어로 추상화할 필요가 적었을 것이다. 시각, 청각, 미각어는 사물과 분리되어 일정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사물 없이 ‘하양, 검정, 빨강, 노랑, 파랑’의 색깔을 떠올릴 수 있다. 음식 없이도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의 감각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냄새는 다르다. 냄새를 감각하더라도 그것을 담는 어휘가 모자란다. 기본 어휘를 정하기도 어렵다. ‘구린내? 지린내? 비린내? ‘쩐’내? 노린내? 퀴퀴하다? 매캐하다?’ 잘 모르겠다. 추상화가 덜 된 냄새는 주로 사물과 직거래한다. ‘입냄새, 발냄새, 방귀냄새, 짜장면냄새, 곰팡이냄새…’ 끝이 없다. 추상보다는 구체에 가까우니,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직접 겨냥한다. 그래서 우리는 늦은 밤 옆 사람이 뭘 먹고 마셨는지를 쉽게 알아차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냄새’도 맡는다. 미국인들은 봉준호 감독에게서 ‘마늘냄새’를 맡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