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복경 ㅣ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2020년 새해 벽두부터 우리 사회의 권위 있는 기관들이 18살 선거권자를 대면하며 허둥대는 모습이 안타깝다. 민주주의 역사가 30년을 훨씬 넘어섰다. 세계 여러 민주주의 지표 기관들이 한국 민주주의를 아시아 최고로 꼽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태어나 자란 18살 선거권자들을 규제 일변도의 구닥다리 선거법 체제에서 맞이하게 되어 참으로 미안하다.
지난 12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권 연령 하향으로 고등학교의 정치화 및 학습권·수업권 침해 등 교육 현장의 혼란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국회에 입법 보완을 요구했다. 선관위가 우려하는 세부 내용은 ①초·중등학교에서 예비후보자 명함 배부 금지 여부 ②초·중등학교에서 연설 금지 여부 ③초·중등학교에서 의정보고회 개최 금지 여부 ④공무원의 지위 이용 선거운동 금지 조항에 사립학교 교원 포함 여부 등이다.
현행 법률과 대법원 판례로도 후보자는 초·중등학교 학내에서 명함을 배부할 수 없다. 초·중등학교의 출입은 학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므로 학교장 허가 없이 후보자가 학내에서 연설이나 의정보고회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 이미 ‘공무원 등 법령에 따라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직위를 이용하여 선거운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있고, 대한민국에서 공립이든 사립이든 교사만큼 정치적 중립 의무를 강제받는 직업도 드물다. 기존 법률과 판례로도 이미 기준이 세워져 있고, 미비한 점이 있다면 기존 법 조항의 해석으로 가능한 일을 왜 굳이 새로운 조항을 삽입하거나 개정해야 하는 것인지 답답하다.
‘학생 모의선거’를 둘러싼 혼란은 훨씬 더 심각하다. ‘모의선거’는 초·중·고등학생 대상 민주시민교육의 일환으로 많은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으며,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법 개정으로 고등학생도 유권자 자격을 갖게 됩니다. 실제 선거와 동일한 시기에 실제와 비슷한 투표용지를 사용해 투표해봅시다. 대표자를 뽑는 활동을 통해, 민주 정치가 우리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건 일본 정부가 2015년 18살 선거권을 도입하면서 일선 고등학교에 제공한 선거교육 부교재에 실린 내용이다.
서울시교육청도 올해 선거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모의선거’ 시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23일 선관위가 공무원의 선거운동 금지 조항을 적용해 선거법 위반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교사가 진행하는 선거교육을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본 것이다. 선거권자인 교사가 선거권자인 고3을 포함한 학생들에게 선거교육을 하는 것이 선거운동이라는 해석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선관위의 이런 해석에 대해 ‘18살 선거권자인 고3만 빼고 모의선거교육을 하겠다’는 답을 내놓았다. 이쯤 되면 코미디의 경지다. 민주시민교육에 당연히 포함되는 선거교육이 어떻게 선거운동이 되나? 당장 선거권을 행사해야 할 고3 선거권자에게 우선 제공되어야 할 프로그램을 그들만 빼고 하겠다는 이 상황은 또 뭔가?
지난 28일 선관위가 내놓은 ‘18세 선거권 부여에 따른 정치관계법 운용 기준’은 선거와 민주주의에 관한 한 한국의 참담한 현실을 확인시켜준다. 이 기준에 따르면 교사가 학교 내 혹은 수업 중에 하는 모든 선거 관련 발언은 문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선거교육을 하지 말라는 얘기로 보인다. 더욱 참담한 것은 한국 사회가 18살 선거권자를 맞이하는 첫 일성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투표만 하라’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련의 사건이 확인시켜주는 것은 18살 선거권이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제도와 규범, 인식이 문제라는 사실이다. 현행 선거법의 규제 틀에 18살 선거권자를 욱여넣을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최첨단의 민주주의 문화와 가치를 담지한 18살 선거권자의 눈으로 현행 선거법을 들여다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