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소속 학생들이 ‘만 18살 선거권’을 위한 법개정안 통과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선생님, 혹시 제 표가 무효가 되면 어떡하죠?”
교실 앞 복도에 세워둔 기표소에 들어가려는 학생의 손이 달달 떨렸다. 손에는 시장·교육감 후보들의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가 들려 있었다. ‘정해진 용구로, 한칸에 한번만!’ 투표방법을 재차 확인한 학생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뜬 뒤 기표소 안으로 사라졌다. 2018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 휘봉고에서 진행된 모의선거에 참여한 학생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고 김영복 교사(현 삼각산고 역사과)는 돌이켰다. 당시 투표에 앞서 학생들의 모둠토론 수업을 이끈 김 교사는 “학생들끼리 가장 원하는 공약이 무엇인지 토론했는데 무상급식과 의무교육이 매우 높은 순위로 나왔다. 실제 지방선거 이후 자신들이 꼽은 공약이 현실에서 정책으로 추진되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라며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꼭 투표하시라’고 권유했다는 학생도 있었다”고 말했다.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만 18살 고등학생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당장 석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이 14만여명의 ‘학생 유권자’들에겐 생애 첫 선거가 된다. 학교 현장에선 모의선거와 같은 체험형 선거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한편, ‘단기 처방’에 그치지 않고 민주시민교육이 자리잡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모의선거 교육이 활성화돼 있는 ‘정치 선진국’과 달리, 국내에서 선거교육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교복 입은 유권자’를 위한 선거교육의 필요성은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지만, 교육 현장에서 축적된 경험이 많지 않다는 의미다. 교실 정치화에 대한 과도한 우려와 입시위주 교육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모의선거도 그동안은 외부단체 주관으로만 열렸다. 올해 들어와서 처음으로 서울시교육청이 예산 등을 지원해 초·중·고 40곳을 대상으로 한 모의선거가 3~4월에 실시된다.
앞서 선거교육을 해본 교사들은 학생들의 인식과 태도 변화 등에서 교육 효과가 적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2018년 사단법인 징검다리교육공동체는 서울·경기·충북·광주 등의 중고등학교 17곳에서 모의선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봉학 의정부고 교사는 “행여 아이들이 ‘연예인 이름과 비슷한 후보를 찍어야지’ 하는 식으로 장난스럽게 접근하면 어쩌나 했는데, 자신들의 학교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공약이 무엇인지, 실현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 꼼꼼히 분석하더라. 어른들이 보는 것보다 훨씬 성숙한 정치적 역량이 학생들에게 잠재돼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참여 학생 264명에게 설문조사를 했더니, ‘모의선거 과정에서 사회문제와 필요한 정책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답한 학생이 85.2%에 이르렀다.
교육부는 3월 새 학기 시작 전에 고등학교 사회과 수업이나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 활용할 수 있는 선거교육 교수·학습자료를 개발한다는 계획이지만, 세부 내용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교육부 주관으로 지난 8일 열린 간담회에서 일선 교사들은 “업무 부담이 많은 개별 교사에게 맡기는 방식이 바람직하냐” “이미 학생회 선거를 치러본 아이들에게 어떤 내용을 더 가르쳐줘야 하느냐”는 등의 질문을 쏟아낸 것으로 전해졌다.
당장 선거교육에 필요한 수업시간 확보도 현실적인 고민으로 떠올랐다. 정규교과 시간은 학습 진도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해 배우는 과목으로 ‘정치와 법’이 있지만, 학생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불리하다는 이유로 기피해 수능 사회탐구영역 가운데 선택률이 10% 정도에 그친다. 비교과 활동을 하는 창의적 체험활동이 1주일에 한두 시간 정도 할애되지만, 선거교육과 달리 법정 의무교육 시수가 정해진 교육 주제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 교육부 쪽은 “선거교육에 사회·국어 등 관련 교과나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어느 정도 할애할지는 학교장의 재량”이라면서도 “이번 선거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 선거교육이 제대로 이뤄지도록 최대한 권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일선 교사들과 청소년단체는 선거교육이 왜 필요하고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 공감대부터 넓혀나가야 한다고 보고 있다. 허진만 학교시민교육전국네트워크 대표(수원 삼일상업고 교사)는 학생들의 정치적 판단력을 길러주는 것이 선거교육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학생들이 정책·공약이나 정당을 분석해보고 자신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따져보고, 본인이 꿈꾸는 사회로 가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며 “학생들의 질문은 모든 교과에서 나올 수 있는 만큼 전체 교사에 대한 연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거연령 하향 운동을 벌여온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배경내 공동집행위원장은 “단순히 투표 절차를 알려주고 금지된 행위부터 가르치는 식이어선 안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권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권리찾기 중심의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부가 학생들을 ‘보호’한다며 공직선거법 위반 사례집을 일선 학교에 배포하기로 한 것을 겨냥한 지적이다. 배 위원장은 “이번에 총선을 치르는 고등학교 3학년뿐 아니라 2022년 대통령선거·지방선거에서 투표할 1학년에 대한 교육도 준비해야 한다”며 “사회교과를 통한 수업뿐 아니라 정책박람회를 여는 등 학생들의 관심도를 높이는 다양한 비교과 프로그램이 병행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모의투표에 참가한 학생들이 각 후보들의 정책을 비교하기 위해 붙여놓은 쪽지들. 징검다리교육공동체 제공
궁극적으로는, 당면 과제로 떠오른 선거교육이 앞으로 학교에서 민주시민교육 활성화로 이어지는 디딤돌이 돼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민주시민교육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기본 질서를 익히고 인권과 다양성에 대해 배우는 등 학생들이 능동적인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선거교육은 민주시민교육의 핵심으로 꼽힌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민주시민교육 활성화’를 국정과제로 삼은 데 이어, 2018년 11월 ‘민주시민교육 활성화를 위한 종합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학교 현장에선 ‘여건이 안 되면 안 해도 그만인’ 범교과 학습주제로 여기는 경향이 짙은데, 어떻게 안착시킬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될 필요가 있다. 시민교육을 하는 교과목을 신설하거나 기존 교과 중 일부를 시민교육으로 전환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독일·프랑스·영국 등에선 ‘정치교양’ ‘시민교육’ 등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수는 “지금 경계해야 할 것은 학교가 정치화될 것이란 우려가 아니라, 그동안 그런 핑계로 규제를 강화해오면서 민주시민교육이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며 “기성세대보다 토론 역량이 훨씬 높아진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무엇이든 자유롭게 논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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