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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죄송하지만’ / 김진해

등록 2020-01-19 18:23수정 2020-02-12 09:40

김진해/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감정을 싣지 않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감정을 싣지 않고 해석하는 건 더 어렵다. 무술을 배우기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나 독일계 캐나다인인 샤론은 내 눈을 쳐다보며 당장 손톱을 깎으라고 말했다. 손톱이 길면 수련 중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타투 예술가인 보리아는 나를 던지다가 내 안경이 바닥에 떨어지자 사과는커녕 다음 시간부터는 안경을 고정시킬 줄을 구해 오라고 했다. 그들은 관계의 깊이보다는 내용 자체(메시지)를 얼마나 적확하게 표현하느냐에 집중했다. 잘 모른다고 우회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한국처럼 배려하기와 눈치보기가 뒤엉킨 사회에서 사람들은 할 말을 제대로 못 한다. 위력을 앞세운 막말은 난무하지만 힘의 차이를 뛰어넘는 ‘평등한 말하기’란 어렵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부터 한다. 말을 꺼낼지 말지부터 고민이니, 애써 말을 꺼내도 말을 휘휘 돌리게 된다. 엉겁결에 튀어나오는 말이 ‘죄송하지만’이다. 관계에 기름칠하는 말이다. 공공장소에서 심하게 떠드는 사람에게 “죄송하지만, 조용히 해주세요”라고 한다. 건질 게 하나도 없는 말을 듣고도 “말씀 잘 들었습니다”라는 빈말을 한다.

‘죄송하지만’으로 말을 시작한다는 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세운 사회질서와 사회적 삶이 태생적으로 취약하다는 걸 보여준다. 나의 말걸기가 ‘정상적인’ 기존 질서를 방해하는 게 아닐까 걱정할 때마다, 한국어라는 언어생태의 보수성을 거듭 확인하고 우리 사회의 불안전성을 절감하게 된다. 사회적 안전함이 단도직입적 말하기를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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