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정 ㅣ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퍽, 퍽, 퍽.”
가장 잔인한 세 음절이다. 이 시대의 잔인성을 드러내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인간의 몸과 대지가 서로를 끌어안으며 뱉어내는 고발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사회인지. 김훈 작가는 이 세 음절로 우리 모두의 위선을 까발렸다. “추락, 매몰, 압착, 붕괴, 충돌로 노동자의 몸이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로.
죽음의 소리다. 매일 ‘김용균’ 3명이 일하다 죽는 소리다. ‘황유미’를 포함한 산업재해 사망자는 하루 평균 6명이다. 노동건강연대에 따르면 지난 9월24일에만 4명이 죽었다. “전북 김제 축사 지붕 위에서 설치 작업하던 노동자 추락하여 사망, 충북 진천 증축공사 현장에서 철골 작업 중이던 노동자 2명 추락하여 사망, 김해 공장에서 일하던 미등록 이주노동자, 토끼몰이식 과잉 단속으로 도주하다 사망.” 이렇게 작년 한해 동안 2142명이 죽임을 당했다. 2001년부터 합하면 4만명이 넘는다.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전쟁터다.
이 전쟁터에서 정부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는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안보’ 정책은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사람들이 매일 일터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평화경제’는 이런 전쟁터를 한반도 전체로 확대하겠다는 구상은 아닌가?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정책을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으나 실상은 반대로 가고 있다. ‘김용균’은 오늘도 죽임을 당하고 있지만 F-35A 전투기 구입에만 올해 1조6천억원을 썼다. 이것도 부족해 내년에는 15% 이상을 늘려 1조8천억원을 편성했다. 국방부는 북에 대한 ‘적극적 억제능력 구비’를 그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그 명분을 풀어 말하면 북의 핵·미사일 시설을 선제타격하는 군사력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올해에만 그 명분에 밀어 넣은 돈이 5조원을 넘었고, 내년에는 6조원을 넘게 된다.
북이 올해 들어 10번 넘게 단거리 미사일이나 방사포 시험한 것만 나무라기에는 낯부끄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오히려 북이 ‘싸구려 무기’로나마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닌지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북의 발사시험들이 한국의 군사적 조치를 정당화시켜주기도 하니 전형적인 안보딜레마다. 지난해의 찬란했던 ‘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북은 이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왜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지소미아 사태가 정직하게 답을 보여주었다. 트럼프 정부가 원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가 아니었다. 강제동원 피해자의 눈물도,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도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한-일 군사협력만이 최대 관심이었다.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한국과 일본에 강요한 것이 진정한 의미의 협력이었을까? 그렇잖아도 차고 넘치는 군사력을 모아서 함께 북에 총구를 들이대자는 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을까? 군사정보 분야부터라도 시작해서 군사협력을 강화해서 중국을 가두어두자는 것이 동북아시아에 평화를 가져다줄까? 싱가포르에서 합의한 한반도 평화체제가 과연 이런 것이었던가?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도 지난 15일 한미안보협의회의에서 협력을 다짐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긴밀히 협력하겠다며 바로 이어서 ‘확장 핵억제’를 강화하겠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평양에서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한반도를 공개적으로 약속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건만, 양국 국방장관은 ‘확장 핵억제’라는 말로 북에 대한 핵위협을 공개적으로 휘둘렀다. 게다가 두 국방장관은 ‘맞춤형 억제 전략’을 공동으로 이행하기 위해 협력하겠다고 한다. F-35A와 같은 무기체계로 선제타격 능력을 구비하고 대량응징보복 능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해서 주한미군 방위분담금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액수가 아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라면 6조원이 아깝겠는가. ‘김용균’이 목숨 걱정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10조원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미 동맹이 한반도에서 안보딜레마를 재생산하는 기제의 한 부분이어도 계속 돈을 퍼부어야 하는가? 주한미군의 역할이 한반도에서 ‘동북아 지역’으로 확장되고, 한-미 동맹의 협력 분야가 핵전략을 넘어 사이버 및 우주 공간까지 뻗치도록 지원해야 하는가?
생명을 죽이는 데 돈을 쓰며 생명을 지킬 수는 없다. 이제는 안보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이 잔인한 소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퍽, 퍽, 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