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인류의 평화를 위해 ‘노파’를 죽여도 된다는 청년 라스콜리니코프가 아닌 또 다른 라스콜리니코프를 보여준다.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한 뒤 고뇌하던 그는 가족을 위해 몸을 던진 매춘여인 소냐 앞에 무릎 꿇고 그 발에 키스한다. “나는 당신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오. 인류의 고통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오.”
1950년 12월1일치 <뉴욕 타임스> 1면. 뉴욕 타임스 갈무리
서재정 |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7월 초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날 해 질 무렵…”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은 이렇게 시작한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 악덕 노파와 그 여동생을 죽이는 ‘죄’를 저지르고, 그 뒤 자수를 하여 시베리아 8년 유배형이라는 ‘벌’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검사의 ‘죄와 벌’ 이야기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 뼈대에 다양한 인간의 이야기를 덧대고 인간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입혀 깊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사회에서 과연 무엇이 죄인가? 누가 죄인인가? 벌이란 무엇인가? 벌을 통해 인간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죄와 벌’은 대북정책에도 등장한다. 리언 시걸은 그의 저서 <미국은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에서 미국의 대북정책을 “죄와 벌의 접근법”이라고 명명했다. 미국 정부가 북을 대하는 방식이 검사가 ‘죄와 벌’을 취급하는 것과 같다고 봤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이 핵무기 개발이라는 ‘죄’를 저지르는 악당국가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따라서 강력한 ‘벌’을 통해 무장해제시킨다는 해결책만이 남는다. “(북을) 범죄자로 악마화해 무장해제하도록 압박하는 것”이야말로 검사의 ‘죄와 벌’이다.
미국은 1994년 핵협상 타결 뒤 북한에 경수로 완공 때까지 한해 3천만달러어치 중유를 제공하기로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터무니없이 값싼 해결책이 있었다. 하지만 ‘죄와 벌’의 프레임에서 협상들은 파탄 났고 타결의 가능성들은 영글지 못했다. 이제 유엔 제재 결의들만이 남아 ‘죄와 벌’ 프레임은 더욱 공고하다. ‘북은 유엔 결의를 위반한 죄를 저질렀으니 제재라는 벌을 받아야 한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 후보자는 “대북정책은 이어달리기가 돼야 한다”면서도 ‘북한 비핵화’를 고집하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일관되게 추진돼온 ‘한반도 비핵화’를 이어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반도 핵위기는 1950년 11월30일 시작돼 아직 계속되고 있다. 그 역사를 모른다면 <뉴욕 타임스> 1950년 12월1일치를 보라. ‘“대통령, 필요하다면 코리아에서 원자탄을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하다.”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이었다. 무슨 비밀문서를 폭로한 것도 아니었다. “핵폭탄 사용은 항상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그 전날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했던 발언을 전한 것이었다. 그 이후 오늘까지 미국은 대북 핵공격 능력과 계획을 유지하고 있다.
북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한반도 안보 구조는 ‘상호억제’가 됐다. 미국이 핵무기로 북을 억제하는 동시에 북도 핵무기로 미국을 억제하는 ‘공포의 균형’ 구조가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한·미 양국은 군사력으로 북의 핵무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선제타격 능력을 포함하는 한국의 ‘3축 체계’가 대표적이고 미국도 선제 핵공격 능력을 포함해 미사일 방어와 선제타격 능력을 꾸준히 개발·배치하고 있다. 북도 뒤질세라 선제타격 능력을 개발하고 있고 선제 핵공격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이제 한반도는 ‘죄와 벌’을 운운할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맞다. “북한의 비핵화는 한반도에 지속가능한 평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아시아와 전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만을 외치는 반지성주의로는 평화도 번영도 이룰 수 없다. “세계 시민 모두의 자유와 인권을 지키고 확대”하겠다는 잣대를 들이대 북에 또 다른 ‘죄’를 묻고 더한 ‘벌’을 주겠다고 한다면 평화도 번영도 위태로울 수 있다.
정부의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은 인류의 평화를 위해 ‘노파’를 죽여도 된다는 청년 라스콜리니코프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또 다른 라스콜리니코프를 보여준다.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한 뒤 고뇌하던 그는 가족을 위해 몸을 던진 매춘여인 소냐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발에 키스한다.
“나는 당신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오. 인류의 고통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오.”
일상생활에서 안전을 걱정하는 여성, 세상에 나서는 것 자체가 불안한 장애인과 소수자, 작업장에서 다치지는 않을까, 죽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노동자, 내일부터는 나오지 말라는 말을 들을까 불안한 비정규직, 코로나 때문에 불안한 모든 사람 앞에 무릎을 꿇은 안보정책을 보고 싶다.
검사의 ‘죄와 벌’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꿈꾸며 칼럼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