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심하게도 나는 아내와 말다툼을 할 때마다 입을 꾹 다문다. 내 잘못이라 달리 변명할 말이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차별의식이 배어 있어 그렇다. 이런 사람들이 경기 내내 얼굴을 감싸고 웅크린 권투선수처럼 입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내가 반격의 찍소리를 하게 되는 경우는 열에 아홉 내용보다는 말투가 귀에 거슬릴 때다.
타인에게 ‘예쁘게 말하라’고 요구하는 상황이 대부분 그렇다. 그런데도 평소에 우리는 말 자체에 ‘곱고 예쁜 말’이 있다고 착각한다. 예쁜 말은 ‘검기울다, 길섶, 싸라기눈, 애오라지, 잠포록하다, 푸서리, 해거름’처럼 한자어나 외래어가 아닌 ‘순수한’ 고유어의 이미지와 닿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예쁜 말’이 무엇인지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왜 고유어는 예쁜 말이고 한자어나 외래어는 예쁘지 않은가. 우리의 정서를 잘 담고 있어서? 어감이 좋아서? 그런 정서와 감각은 모두 같을까? 말뜻이 잘 통하고 더 많은 이를 포용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예쁜 말’ 아닐까? 예쁜 말은 따로 없다.
더구나 대화 장면에서 ‘예쁜 말 하기’는 예쁜 낱말을 골라 쓰라는 뜻이 아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말 예쁘게 합시다’, ‘예쁘게 말하면 다 들어줄 수 있다’는 말은 대화 내용에 대해는 ‘할 말 없음!’이지만 대신 내가 그어놓은 선을 넘지 말고 고분고분 말하라는 이율배반의 뜻이다. 동등한 위치가 아님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신호이자 자신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자백이기도 하다. 적어도 섣달그믐까지는 예쁘게 말하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