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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경식 칼럼] 종말은 이렇게 올 것이다

등록 2019-08-22 18:14수정 2019-08-23 09:35

만일 이런 자국의 침략 책임을 다룬 작품을 일본인 작가가 자발적으로 만들어 별다른 방해 없이 일본 각지에 설치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사태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징용 피해자들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다수의 일본 국민에게도 바람직한 상황이 아닌가. 일본은 가능했을 그런 길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지난 8월3일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 국제예술제의 일환인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를 중지한다고, 이 전시 실행위원장인 일본 아이치현의 오무라 히데아키 지사가 갑작스레 발표했다. 이 기획전에 반대하는 세력이 “테러 예고와 협박 전화” 등을 했고, 전시 작품을 “‘철거하지 않으면 가솔린통을 들고 찾아가겠다’는 팩스도 보냈다”고 한다.

이 전시회는 ‘위안부를 표현한 소녀상’과 ‘쇼와 천황 초상이 불타는 영상작품’ 등 지금까지 일본 각지의 미술관에서 철거되거나 작품 해설을 바꿔 쓰도록 강요당한 20여점을 ‘표현의 자유’를 생각하는 계기로 삼고 싶다는 취지(주최자)에서 이뤄졌다. 그것이 개막 뒤 겨우 사흘 만에 협박 때문에 중지당하게 된 것이다.

나고야시의 가와무라 다카시 시장은 이 기획전이 “일본 국민의 마음을 짓밟은 행위”라고 거칠게 비난했다. 실행위원장인 오무라 아이치현 지사는 가와무라 시장의 발언이 헌법이 금지하는 ‘검열’에 해당하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표시하며 반발했다. 지사의 그 발언 자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책임이 있는 지사 자신이 헌법 위반인 줄 알면서 협박에 굴복했다고 스스로 고백한 셈이 됐다. 협박한 자는 물론이고 오무라 지사도, 전시 작품을 지켜야 할 입장에 있는 예술감독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예술제에 출품한 작가들은 이번 조치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항의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8월10일 현재 동참한 이들은 87명이다.)

이런 상궤(바른길)를 벗어난 상황을 나고야 시장이나 오사카부(府) 지사라는 정치인이 부채질한다. 정부의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사실관계를 확인, 자세히 조사하겠다”고 말해, 문화청의 보조금 교부 중지 의사를 넌지시 밝혔다.

지금 나의 뇌리에 비치고 있는 것은 ‘종말’의 광경이다. 예술전에 대해 무뢰배(깡패)들이 범죄 그 자체인 협박을 한다. 그것도 최근에 일어난 애니메이션 제작회사 방화 살인사건을 기화로 협박한다는,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비열한 수법으로 말이다. 그것은 한두 사람의 짓이 아니다. 지난 15일까지 아이치현 당국에 걸려 온 ‘항의’ 전화와 팩스, 전자우편은 약 5700건에 이르렀다고 한다. 협박한 세력은 비열한 수법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권력자들이 그들의 행위를 환영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종말은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예술행위는 그것을 알리는 경종이다. 예술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인간의 감성 자체에 대한 간섭이다. “예술에 관한 것이니까” “예술은 나날의 생활에 직결되지 않는 일종의 ‘사치’니까”라는 등의 심리로 시민이 이 경종을 경시하기라도 하면 그것은 곧바로 감성 자체에 대한 통제로 이어진다. 무엇이 ‘미’이고 무엇이 ‘추’인가 하는 기준까지 권력이 강제하게 된다. 그런 광경을 우리는 일찍이 일본에서, 독일에서, 세계의 도처에서 거듭 목격하지 않았던가.

‘걸림돌’(Stolperstein)이라는 아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독일 쾰른 거주 조각가 군터 뎀니히가 1993년에 시작한 아트 프로젝트다. 사각형의 보도 포장석의 하나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고 거기에 (2차 세계대전 때) 그곳에서 강제이송당한 유대계 시민들 개개인의 이름, 이송 날짜, 이송처, 그리고 확인될 경우 사망한 해까지 새겨져 있다. ‘걸림돌’이라는 이름대로 무심코 걷다가 뭔가 어긋난 박자에 발이, 또는 마음이 걸려 나치즘의 역사를 상기하게 된다.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진 예술 작품이다. 독일 국내의 주요 도시들은 물론 빈이나 잘츠부르크 등 예전에 나치스가 지배할 때 유대인들이 희생을 당한 도시들에서 거리를 주의깊게 걷기만 하면 누구라도 발견할 수 있다.

피해자의 눈으로 본다면 도저히 충분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독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진지하게 과거와 대면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의 독일인들이 유럽 한복판에서 예전의 피해 민족들에 에워싸여 살아가기 위해 발휘한 지혜의 하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 역시 아시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려 한다면 이런 지혜를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이런 자국의 침략 책임을 다룬 작품을 일본인 작가가 자발적으로 만들어 별다른 방해 없이 일본 각지에 설치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사태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징용 피해자들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다수의 일본 국민에게도 바람직한 상황이 아닌가. 일본은 가능했을 그런 길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일본 국민 다수는 이성적 판단이나 자주적 결정을 하지 못하고 적극적이든 무관심 때문이든 지배층의 뒤를 따라 다음 ‘종말’을 향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또 하나의 예술 이야기를 해보자. 과테말라에 다니엘 에르난데스 살라사르라는 사진 아티스트가 있다. 과테말라 내전(1960~1996년) 말기부터 이른바 비밀묘지(내전 중 게릴라 소탕작전의 민간인 희생자들이 유기된 장소)의 발굴조사에 종종 동행해서 유골·유품에 대한 기록촬영을 했다. 그 작품은 양어깨에 흰 날개를 단 ‘천사’가 “여기에 있어” 하고 소리치는 모습이다.

‘과테말라 어느 천사의 기억’ 가게쇼보(影書房), 2004
‘과테말라 어느 천사의 기억’ 가게쇼보(影書房), 2004
‘과테말라 어느 천사의 기억’ 가게쇼보(影書房), 2004
‘과테말라 어느 천사의 기억’ 가게쇼보(影書房), 2004
잘 살펴보면 그 날개는 발굴된 희생자(다수는 원주민)의 견갑골(어깨뼈)이다. 다니엘 에르난데스 살라사르와 그의 동료들은 군사정권의 탄압을 피해 잽싸게 이 작품을 과테말라 각지에 붙이고, 또 북미의 미군기지나 유럽인의 원주민 정복기념비에 붙이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 작품의 전시회가 2004년 도쿄에서 열렸고, 나도 작가와 함께 갤러리 토크에 참가했다. 그때 청중 속의 일본인 아티스트가 한 발언을 잊을 수 없다. 그는 거리에 작품을 전시하는 다니엘이 “부럽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공공장소에 작품을 전시하려면 온갖 번잡스러운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니엘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이런 작품 전시에 작가가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노력을 해야 하는지 상상해 보라고 했다. 그런 아트이기에 비밀리에 묻힌 주검을 발굴하고 군사정권이 은폐하려는 진실을 폭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 사건은 내게 그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티스트는 허가가 있든 없든 진실을 발굴하고 얘기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종말’의 도래를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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