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모든 언어에는 인칭대명사가 있다. ‘나, 너, 그’, ‘I, You, He/She’. 이 인칭대명사가 언어의 본질로 통하는 쪽문이다. 우리 삶은 대화적인데, 언어가 본질적으로 대화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대화 상황에서 말을 한다. 대화는 말하는 이, 듣는 이, 시공간을 포함한다. 이를 뺀 언어는 죽은 언어이다. 인칭대명사는 언어가 본질적으로 대화적이라는 걸 보여 주는 증거다. ‘토끼가 씀바귀를 맛나게 먹는다.’고 할 때 ‘토끼’와 ‘씀바귀’의 개념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나/너’는 언제 ‘나/너’가 되는가? 오직 ‘나/너’가 쓰인 대화 상황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밥값은 내가 낼게.’ ‘아냐, 내가 낼게.’ 같은 바람직한 장면이나 ‘밥값은 네가 내라.’ ‘아냐, 네가 내라.’ 같은 험악한 상황에서 ‘나/너’는 대화 상황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만을 가리킨다. ‘나’와 ‘너’는 늘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한다. 순식간에 ‘나’는 ‘너’가 되고 ‘너’는 ‘나’가 된다. 3인칭이라고 불리는 ‘그’는 전혀 다르다. 언어학자 뱅베니스트는 3인칭은 없을뿐더러, 3인칭이란 말이 인칭의 진정한 개념을 말살시켰다고 쏘아붙인다. ‘그’는 대화 상황에 없는 사람을 대신 표현하는 것이고 대화에 따라 바뀌지도 않아 진정한 인칭일 수 없다. 대화 상황에서만 생기고 수시로 변경되는 ‘나, 너’만이 인칭대명사이다. 그래서 대화 자리에 없는 ‘그’는 늘 뒷담화 대상이 된다. 끝까지 대화 현장에 있어야 한다. 삶은 ‘나’와 ‘너’가 현재적으로 만드는 대화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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