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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경식 칼럼] 다시 한번 ‘선한 미국’

등록 2019-06-27 18:42수정 2019-06-27 19:20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6월 초순 어느날 도쿄의 간다진보초에서 그 영화를 봤다.

진보초는 출판사와 서점이 모여 있는, 오랜 역사를 지닌 거리다. 나는 젊었을 때 자주 이 거리의 이와나미서점 본사를 찾았다. 당시 월간지 <세카이>(세계)의 편집장으로, 나중에 그 회사 사장에 취임한 야스에 료스케씨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열렬한 연대자였다. 나는 30대의 젊은이였고, 형들은 한국에 유학 갔다가 투옥돼 있었다. 그런 내게도 야스에씨는 바쁜 시간을 할애해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야스에씨는 단순한 출판인에 머물지 않고 일본 정부의 조선(한반도)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실천적 제언과 행동을 평생 이어갔으나, 1998년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났다. 그 일은 전후 일본에 가까스로 존재했던 ‘선한 일본’이 끝난 순간으로 내게는 느껴졌다.

내가 진보초를 자주 찾은 것은 여러 용건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그런 용건들 자체보다 거리의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고서점을 몇군데 돌아다니며 고금의 명저들 책등 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 감성이나 지성이 확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치면 어스름한 찻집 구석에 앉아 금방 산 책을 펼쳤다. 여름에는 ‘스즈란(은방울꽃)로’ 입구에 있는 오랜 전통의 중국 음식점에서 명물인 ‘중화 메밀 냉국수’도 즐겼다. 진보초는 내게 지성에 대한 젊은 날의 겸손한 동경과, 그때는 아직 살아 있던 ‘선한 일본’에 대한 기억을 환기한다.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Ex Libris―The New York Public Library)를 보고 진보초 거리로 나왔을 때 그런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것은 ‘선한 미국’의 기억이었다. ‘선한 미국’이란 내가 3년 전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을 것이 확실해졌을 때 이 칼럼에서 쓴 말이다. “악몽은 또 한 걸음 현실로 다가왔다”고 나는 당시 체류 중이던 뉴욕에서 썼다. 악몽의 한복판에서도 내가 아는 ‘선한 미국’은 여전히 분투하고 있다는 취지였다. 그로부터 3년여가 지난 지금 트럼프 정권이 보여준 악몽들은 일일이 헤아릴 수가 없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 반지성주의가 적지 않은 지지를 받고 있는 현실이다. 최근 보도에서는 공화당 지지층 중에서 트럼프의 인기가 높고 대통령 재선도 유력하다고 한다.

이 영화는 올해 89살이 된 다큐멘터리 영화의 거장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41번째 작품이다.(몇 작품을 봤는데, 전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코메디 프랑세즈-사랑 놀이>(1996)다. 연극예술의 진정한 재미를 느끼게 해준 명작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뉴욕 공공도서관을 포함한 총 92개 도서관으로 이뤄진 거대한 ‘지의 전당’의 겉과 속을 실로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감독은 말한다. “뉴욕 공공도서관은 책을 찾거나 자료를 열람하러 가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주민이나 시민을 위한 중요한 시설이기도 하다. 가난하고, 이민자들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특히. … 뉴욕 공공도서관은 가장 민주적인 공공시설이다. 다양성, 기회균등, 교육 등 트럼프가 싫어하는 모든 것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촬영한 것은 2015년 가을이니까 트럼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 그럼에도 트럼프가 당선됨으로써 원래의 주제 선택과는 관계없는 이유로 정치적인 영화가 됐다.”(감독 인터뷰, 영화사 제공 자료)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정치적인 영화가 됐다”는 것은 와이즈먼 감독의 지성이 그만큼 깊은 의미에서 ‘정치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지성은 트럼프적인 것과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영화는 3시간25분짜리 장편이지만 관객을 조금도 싫증나게 하지 않는다. 사서나 이용자들 모습은 물론 운영을 둘러싸고 솔직하게 의견을 나누는 스태프 회의, 도서관에서 열리는 연주회나 댄스 교실, 어린이들을 위한 낭독 교실이나 할렘 지구 분관에서 진행된 지역주민(대부분 흑인 주민)과의 대화 등은 흘러가는 대로 보고만 있어도 양질의 지적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이 도서관에서는 젊은이들을 초청해 공개적으로 토크쇼를 하는 이벤트가 열린다. 매우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다. 영화에서 소개된 강사진의 선두주자는 기독교 원리(근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 박사다. 그리고 뮤지션 엘비스 코스텔로, 시인 유세프 코무냐카, 여성 록 가수로 ‘펑크 여왕’이란 별명을 지닌 패티 스미스, 도예작가 에드먼드 더발 등이 등장한다. 마일스 호지스의 자작시 낭독도 매력이 흘러넘쳤다. 얼마나 풍성한 라인업인가.

1975년 태생의 타네하시 코츠는 <세상과 나 사이>로 높은 평가를 받은 젊은 세대의 흑인 작가다. 그는 어눌한 어투로 말했다. “우리 집에서 맬컴 엑스는 신이었죠. 이 책의 뿌리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폴은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활동한 흑인해방조직 블랙팬서당의 당원이었다고 한다.

뉴욕 공공도서관의 ‘흑인문화연구도서관’은 할렘 지구에 있는데, 흑인문화 연구를 위한 중요한 거점이다. 관장은 창립 90주년 기념 축하모임 인사에서 “도서관은 민주주의의 기둥”이라는 노벨상 수상 작가 토니 모리슨의 말을 인용했다. 할렘 지구의 분관에서 열린 지역주민과의 대화에서는 교과서의 기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미국 남부로 연행당한 흑인 노예들에 대해 “이주했다”는 거짓말이 쓰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 이 영화는 시종 즐겁고, 보는 이에게 얻기 어려운 해방감을 안겨준다. 그것은 트럼프류의 자기중심주의, 차별주의, 돈벌이주의 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 지성이 가져다주는 기쁨의 지평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본에 온 뉴욕 공공도서관 섭외 담당자 캐리 웰치는 말했다. “지금 뉴욕에서 돈 한푼 내지 않고도 안심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는 도서관 정도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가면 컴퓨터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요. 돈을 전혀 쓰지 않고도 안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서로 고립된 채 스마트폰 화면만 보고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물리적인 장’으로서 도서관이 지닌 중요성이 압도적으로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영화사 제공 자료)

지난 칼럼에서 나는 ‘신자유주의적 시간’과 대비되는 ‘도서관적 시간’이라는 이상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것이 여기에 살아 있다. 이것이 곧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도서관적 시간’이다. ‘선한 미국’의 명맥은 아직도 끊어지지 않았다. ‘선한 일본’은 어떠한가. 이미 죽어 없어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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