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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언어의 퇴보 / 김진해

등록 2019-06-02 17:43수정 2019-06-02 19:41

16일 오후 서울 청와대 춘추관 앞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 촉구 기자회견에서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 참석자들이 관련 현수막을 들고 서 있다. 연합뉴스
16일 오후 서울 청와대 춘추관 앞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 촉구 기자회견에서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 참석자들이 관련 현수막을 들고 서 있다. 연합뉴스
말 몇마디만 듣고도 그 사람 고향을 어림잡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게 꽤나 솔깃했던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발음으로 네 편 내 편 갈라 해코지를 한 사례들이 많다.

‘쉽볼렛 테스트’라는 유명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길르앗과 에브라임이라는 유다의 두 파벌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패전한 에브라임 사람들이 강을 건너 도망치는데, 길르앗 사람들이 길목을 막아서며 ‘쉽볼렛’이라는 단어를 말해보라고 시킨다. 제대로 못 하고 ‘십볼렛’이라고 하면 잡아서 죽였다. 그 수가 4만2천명이었다. ‘쌀’을 ‘살’이라 하면 죽이는 격이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말로 ‘15엔 50전’(주고엔 고주센)이란 말을 시켜 제대로 못 하면 조선인이라 하여 바로 살해했다. 발음이 생사를 갈랐다.

나는 가끔 태극기집회에 간다. 그곳엔 어떠한 머뭇거림도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추겼고, 확신에 찬 1만명은 마치 한 사람 같았다. 그 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다 빨갱이였다. 언어는 퇴보하고 있었다. 막힌 하수구처럼 다른 말은 흐르지 못했다. 고향을 알면 빨갱이인지 알 수 있단다. 소득주도성장 때문에 나라를 망친 대통령은 빨갱이다. 북한에 돈을 제일 많이 갖다 바친 전임 대통령은 빨갱이다. 노란 리본 달고 다니는 놈들은 빨갱이다. 그래서 다 죽여야 한다. 빨갱이면 왜 죽여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먼저 죄인이라 불러놓고 죄목을 찾는다.

비통함이 없는 분노는 얼마나 위험한가. 망설임이 없는 적개심은 얼마나 맹목적인가. 거기, 나의 아버지들이 단어 하나를 부여잡고 막무가내로 앉아 있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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