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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경식 칼럼] ‘도서관적 시간’을 되찾자

등록 2019-05-02 17:24수정 2019-05-02 18:59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내가 일하는 대학 도서관장에 취임한 지 1년이 지났다. 취임 때 지극히 간단한 총장의 지시가 있었다. “학생들이 좀더 책을 읽게 해 주세요.” 나는 그것을 ‘도서관적 시간을 되찾자’는 과제로 이해했다. ‘도서관적 시간’이라는 것은 내가 만든 말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 시간’의 반대어다. 도서관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도서관적 시간’을 ‘신자유주의적 시간’이 침식하고 있다. 이번에는 그 얘기를 할 작정인데, 그 전에 먼저 짚어야 할 게 있다.

지난 1일 일본에서는 천황이 퇴위하고 새 천황이 즉위하는 행사가 열렸고 그와 함께 ‘연호’도 ‘헤이세이’(平成)에서 ‘레이와’(令和)로 바뀌었다. 지금 언론 보도를 보면, 일본 사회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환영하면서 들뜬 분위기에 젖어 있다. 강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신민’(臣民)이 되는 걸 기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일찍이 2차대전 이후의 천황제를 가리켜 “전근대(프리 모던)와 근대 이후(포스트 모던)의 공범관계”에 비유한 적이 있다. 알기 쉬운 예로, 공적 문서나 은행거래 서류 등을 개인 컴퓨터에 입력할 때 서기와 연호가 병존·혼재하고 있기 때문에 몹시 번잡스러운 점을 들었다. 알게 모르게 이 번잡스러움에 익숙해져버릴 때 천황제를 마치 자연현상인 듯 내면화한다. 그런 효과를 의도하는 것이다.

천황제라는 전근대적인 제도와 컴퓨터로 대표되는 포스트 모던한 선진 기술이 상호보완적으로 유착해 있다. 거기에 결여돼 있는 것은 ‘근대’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란 개인의 독립과 존엄, 법 앞의 평등, 기본적 인권, 사상표현의 자유 등 프랑스혁명을 거쳐 인류 역사가 조금씩 구현해온 보편적인 가치를 말한다. 천황제에 대해 식민지배 책임이나 전쟁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그것이 봉건적 신분제에 토대를 둔 사상이라는 한가지만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종언을 고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몇몇 식자들이 지적하고 있지만, 연호는 인민의 시간을 지배자(군주)의 잣대로 끊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민의 시간감각에 대한 지배다. 권력층에 불편한 일은 달력을 넘기듯이 ‘과거의 것’으로 치부된다. 그럼에도 과거의 은폐나 망각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지탄받고 배제돼간다. ‘위안부 문제’나 ‘징용공 문제’ 등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식민지배 책임 문제도 헤이세이 이전의, 쇼와 시절의 일로 ‘과거화’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다. 물에 흘려보내자”라는, 강자와 가해자, 기득권자들이 항상 좋아하는 얘기가 돼버리는 것이다.

이제 도서관의 위기에 대해 말해보자. 위기는 주로 두가지 방향에서 덮쳐온다. 하나는 사회 전체에 퍼진 독서문화의 쇠퇴다. 재작년의 문부과학성 조사에서는 (잡지를 빼고) 1년간 전혀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의 비율이 50%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하나는 ‘비용 대 효과’ ‘성과주의’라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이 문화와 교육 영역까지 침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잘 모르겠으나 일본에서는 대학 도서관 예산은 늘 삭감 대상이고 다수의 도서관이 최근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압력에 장시간 노출돼왔다. 전임 사서의 수가 줄고 외부촉탁 비율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이런 경향의 배경에 도서관의 존재가치를 단기적인 ‘비용 대 효과’로 계산하려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이 있다. 이 발상에 빠지면 도서관의 가치는 학생의 취직률이나 자격 취득률이라는 알기 쉬운 수치로만 계산된다.

도서관의 사명은 보편적인 시야를 견지하고 인류의 지성에 봉사하는 데에 있다. 그 가치는 개인이나 기업, 정부의 수명보다 훨씬 더 긴 척도로만 잴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카를 마르크스는 영국 망명 중에 대략 30년간 영국 도서관에 다니면서 <자본론>을 썼다. 이는 마르크스 개인의 업적임과 동시에 도서관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의미에서 영국 도서관의 업적이기도 하다. 그런 지적 행위의 가치를 단기적인 척도로 재기란 불가능하다.

재작년 일본의 어느 지방대학 도서관에서 약 3만8천권의 장서가 폐기, 소각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사실이 보도되자 현대의 ‘분서’인가, 라는 비판이 고조됐다. 대학 쪽은 장서를 둘 공간의 제약 때문에 신중하게 가려낸 장서를 처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를 곧바로 나치스 등 정치권력의 ‘분서’와 엮어 비난하는 건 좀 섣부른 짓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정리해버려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정치권력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위압하지 않더라도 차근차근 예산을 줄이고 동시에 ‘비용 대 효과’를 집요하게 요구하면 ‘보탬이 되는’ 책만 소장하거나 장서를 소각하는 대응책으로 나올 공산이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대의 ‘분서’는 폭력에 호소할 것도 없이 ‘신자유주의적’인 수법으로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원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젊은 시절 도서관에 특별히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다니던 때의 엄숙했던 생각을 지금도 가끔 떠올린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들어찬 서적들의 등표지, 손에 든 책이 주는 묵직한 느낌, 종이와 잉크 냄새, 옛 사람이나 외국인 등 몰랐던 저자의 이름이나 경력을 생각하는 외경의 염. 얼마나 많은 지적 연찬을 거기에 쏟아부었고, 내가 모르는 세계가 얼마나 깊숙이 거기에 펼쳐져 있을까. 하다못해 그 끝자락만이라도 접촉해보고 싶었던 겸허한 동경의 마음. 그 외경과 동경이 나라는 인간의 골격을 만들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간단히 답을 얻을 수는 없는 깊은 질문(대체로 인간에 관한 질문은 모두 그러하다)에 침잠하면서 끝없는 문답에 몰두한다. 그 사고 과정 자체가 풍요와 기쁨에 차 있다. 그것이 곧 ‘도서관적 시간’이다. 스마트폰의 검색 기능에 의존하면서 그런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얻을 수 있는 ‘해답’에 덤벼드는 태도는 그 학생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평화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그것은 만사를 단순히 유형화해서 타자를 통째로 차별하고 적대시하는 자세로 이어진다. 혐오범죄의 온상이며, 전쟁 배양기다. 지배자가 바라는 것은 그런 ‘신민’이다.

인간 이외의 존재가 책을 쓰고 읽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기쁨, 자유로운 인격으로 자신을 형성해가는 기쁨이다. 그런 기쁨을 학생들에게도 제공하려는 장소가 바로 도서관이다. 그러려면 자유롭고 관대한 ‘도서관적 시간’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신자유주의적 시간’과 ‘천황제적 시간’에 대항해서 인간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번역 한승동/독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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