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는 일부 행동들은 남이 먼저 수행한 행위가 전제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무언가에 ‘반대하는 행동’은 누군가가 선행하는 어떤 행동을 했을 때에야 가능하다. 곧 ‘반대’는 누군가의 ‘의견’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의한다’는 행위 역시 상대방의 ‘의견’이나 ‘제의’가 앞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뚱딴지같은 말이 된다.
컴퓨터나 인터넷의 각종 이용 도구를 처음 사용할 때는 그 사용 약정을 읽고 ‘동의 여부’를 표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약정문의 길이도 엄청나지만 글자의 크기도 깨알 수준이어서 일일이 읽어가며 태도를 정할 수가 없다. 또 각종 서류 양식 기준에 따르다 보면 그 약정문에 동의를 아니 할 재간도 없다. 결국은 찜찜하지만 ‘동의함’을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동의 역시 그 상품 제공자의 의견이나 제안이 있어야 맥락이 제대로 성립한다. 그러나 인터넷 이용 도구나 상품의 약정에서는 제공자의 요구와 일방적인 개념 정의만 있을 뿐 자신들의 책임이나 의무를 명시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것이 없는 ‘동의’는 사실상 ‘동의함’이라고 쓰고 ‘승복함’이라고 읽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생산자와 판매자가 시장을 지배하면서 나타나는 패배한 소비자의 모습이다. 이제는 각종 규약이나 약정의 문장 자체가 ‘소비자의 맥락’으로 다시 쓰여야 한다. 시장은 상품 제공자들만의 힘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상품 제공자와 소비자의 균형 잡힌 상호 행위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김하수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