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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혜진, 노동 더불어 숲] 오만 혹은 기만

등록 2019-04-04 18:11수정 2019-04-08 16:55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우리 유미가 삼성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렸는데, 근로복지공단에 자문을 하는 전문가들은 유미가 직업병이 아니라고 했어요. 벤젠에 하루 종일 노출된 채 10년은 일해야 백혈병에 걸리는데 유미는 그렇지 않았다면서요.” 삼성에서 반도체를 만들다 사망한 황유미씨의 아버지와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였다. 황상기씨의 어조는 담담했지만 은근한 분노가 묻어 있었다. 죽음에 이른 피해자들이 삼성 직업병의 증거인데, 이 증거를 외면한 채 과거의 기준에 현실을 맞추려고 했던 이들에 대한 질타였다.

2004년 정부는 소위 ‘비정규직보호법’을 내놓는다. 노동자를 기간제로 자유롭게 쓰되, 2년 후에는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내용이었다. ‘2년 후 정규직화 조항’ 때문에 해고된 경험을 가진 파견노동자들은 ‘내가 증거’라고 말하며, 이 법이 2년마다 노동자를 교체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사를 점거하고 입법 중단을 호소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비정규직들에게 “이 법은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법이며, 당신들이 오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법은 2007년 결국 시행되었다.

삼성 반도체를 만들던 노동자들이 직업병으로 사망했다는 것, 이제는 상식이다. 소위 ‘비정규직보호법’이 비정규직 확산법이며 노동자 삶의 안정성을 망가뜨렸다는 것을 지금은 모두가 안다. 그런데 반도체공장 노동자들의 산재 사망을 부인하고, 비정규직법이 ‘보호법’이라고 주장했던 전문가들과 정치인들은 아직 사과하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을 만들고, 그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비판한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안을 결정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본회의 전날, ‘경사노위에 청년은 없다’는 제목으로 청년들이 탄력근로제 반대 선언을 발표했다. 그런데 경사노위의 누군가가 이 선언을 제안한 파리바게뜨 지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탄력근로제에 대해 잘못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으니 직접 찾아가서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한다. 그 선언에 참여한 청년 비정규직들이 ‘뭘 잘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파리바게뜨는 2018년에 제빵기사 자회사 고용과 노동조건 개선에 합의했다. 회사는 소수노조인 파리바게뜨 지회를 무시하고, 다수노조와 단체협약을 맺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노동조건은 달라진 것이 없고 노동자들은 합의 내용조차 알 수 없었다. 경사노위에서 합의된 탄력근로시간제는, ‘근로자대표와 서면합의’만 하면 11시간 연속휴게시간을 주지 않아도 되고, 임금보전 방안을 마련하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다.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가 얼마나 허무하고 일방적일 수 있는지 파리바게뜨 노동자들이 이미 경험하고 있는데, 경사노위는 도대체 무엇을 이해시키겠다는 것일까.

‘말’로 ‘현실’을 덮는 전통은 참으로 유구하다. 문재인 정부는 ‘양극화 해소’를 위해 최저임금을 올렸지만 산입범위를 확대해서 최저임금 인상의 효과를 없앴다. 그러면서도 “저임금 노동자들의 피해는 없다”고 주장했다. 최저임금 인상 효과가 사라진 현대그린푸드 노동자들이 청와대 앞에 모여 “우리가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의 피해자이다”라고 절규하는데, 저임금 노동자에게 피해가 없다던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은 말이 없다. 경사노위는 파업 시 대체근로 투입, 사업장 안에서의 쟁의행위 금지 등 ‘노조 할 권리 박탈’을 논의하면서도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고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이 맞아서 아프다고 항변하고 있는데, 때리는 정부가 “네가 아픈 것은 착각”이라고 꾸짖는다. 자신들은 틀릴 리 없다는 오만이거나 의도를 속이려는 기만, 둘 중 하나다. 둘 다 나쁘다. 정부가 지금 추진하는 탄력근로제와 최저임금제도, 노조법 개악을 멈추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기업을 달래려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하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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