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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노순택, 장면의 그늘]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외계어

등록 2018-09-27 18:13수정 2018-09-28 16:02

위에서 밧줄이 내려왔다. 명절음식을 싼 보자기를 묶자 이리저리 흔들리며 때론 굴뚝에 부딪치며 꾸역꾸역 밥이 올라갔다. 굴뚝 아래와 굴뚝 위, 사람들은 따로 또 같이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고 잠시 웃었다. 맨날 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홍기탁·박준호, 파인텍의 두 노동자는 굴뚝 위에서 317일을 보내고 있었다.
노순택
사진사

아무도 “한가위만 같아라”는 덕담을 내뱉지 않았다. 고개를 쳐들고 시리게 맑은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넉넉하게 살 오른 보름달은 거기 없었다. 깡마른 두 남자가 75미터 굴뚝 위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동산 위에 떠오른 달님을 반기듯 사람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니 탄식이었다. “홍기탁·박준호! 어서 내려오자! 힘내! 설 차례상은 여기에 안 차릴 거야! 겨울 오기 전에 만나자!” 굴뚝 위에서 뭐라 답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바람에 흩어졌다.

위에서 밧줄이 내려왔다. 명절음식을 싼 보자기를 묶자 이리저리 흔들리며 때론 굴뚝에 부딪치며 꾸역꾸역 밥이 올라갔다. 굴뚝 아래와 굴뚝 위, 사람들은 따로 또 같이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고 잠시 웃었다. 맨날 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지난 24일 홍기탁·박준호, 주식회사 파인텍의 두 노동자는 굴뚝 위에서 317일을 보내고 있었다. 2015년 408일이라는 목숨 건 고공농성 끝에 맺은 노사합의가 휴지조각처럼 버려지자 다시 감행한 고공농성이지만, 공장부지 매각이라는 급한 불을 끈 김세권 회장은 만사가 태평하다. 지난여름 기록적인 폭염에도 말라죽지 않고 살았으니 버틸 테면 더 버텨보란 뜻일까. 고용노동부의 수수방관은 회장의 뻔뻔함보다 아찔하다.

사람들은 서둘러 차례상을 정리했다. 상 차릴 곳이 한군데 더 있었다. 서울고용노동청 4층, 사무실 한구석을 점거하고 집단단식농성에 돌입한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간소하게 차례상이 차려지고 그 앞 벽에, 사무용지에 인쇄된 세 사람의 사진이 붙었다. 류기혁·박정식·윤주형, 현대기아차에서 일했으면서도 기간제 파견직이라는 이유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현대기아차 노동자 아님’ 취급을 받던 이들이었다. 차별에 반대하고 저항한 까닭에 해고되고 손배가압류 당하고 끝내 목숨을 끊은 청춘들이었다.

죽은 동료에 대한 추억을 더듬다가 농성자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움만은 아니었다. 동료들이 목숨을 끊어가며 부당하다 외쳤던 파견법을 바꾸지 못한 자책의 눈물이었다. 불법파견을 멈추고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법원 판결마저 짓밟는 회사 쪽과 감독권을 내버린 노동부에 대한 분노의 눈물이었다.

기아차 비정규직 김수억 지회장은 목이 멘 채 겨우 말을 이었다. “2004년 노동부는 현대차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했습니다. 2010년 대법원도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판결했습니다. 2014년과 2017년 기아차 하청노동자들도 정규직임을 인정받았습니다. 지난 정부 시절 문재인 의원은 악법 중의 악법이 비정규직 파견법·기간제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까. 14년 동안 사측이 불법노동행위를 멈추지 않는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 196명이 해고되고, 36명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항의하는 노동자에게 사측이 자행한 손배가압류가 4천억원이 넘습니다. 정부가 제 할 일을 했더라면 동료들이 목숨을 끊고 이런 맑은 가을날 곡기를 끊으며 눈물 흘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법을 저지른 정몽구는 감옥에 가지 않는데, 법을 지켜달라 호소하는 우리만 왜 감옥에 갇히고, 목숨을 끊어야 합니까.”

아무도 “한가위만 같아라”는 덕담을 꺼내지 못했다. 굴뚝 앞에서 고개 들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이번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잊었다.

적어도 그 순간,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개소리는 개도 알아듣기 힘든 외계의 언어였다. “행정은 법을 집행한다”는 헛소리는 개미가 방귀 뀌며 주고받는 미지의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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