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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노순택, 장면의 그늘] 외국보다 낯선 애국

등록 2018-08-30 18:02수정 2018-08-31 13:06

애국이 천대받는 세상에서 애국자들은 ‘박정희의 심정으로’ 거리로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애국의 길’ 위에서 나는 군복 입은 아버지를 만나고, 태극기를 흔드는 어머니를 만나고, 성조기를 든 삼촌과 이모를 만난다. 드물게 사촌 형제와 조카를 만난다.
노순택
사진사

나는 거리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어머니를 만나고 삼촌과 이모를 만났다. 아버지는 군인이 아니면서도 군복을 입고 계셨다. 까만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어서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다. 날카롭게 굳은 표정과 차림새는 아버지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사람,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닮아 있었다. ‘아버지!'를 부르며 살갑게 다가가는 대신 ‘충성!'을 외치며 거수경례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그렇게 박정희를 좋아하시나요. 너는 모른다. 그 시절 피눈물 나는 배고픔을.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민족을 그 배고픔에서 구해주셨다.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니. 막걸리를 좋아하는 서민적인 분이었지. 아버지, 박정희는 카메라 앞에선 막걸리를 마시고, 밤이 되면 여자를 주무르며 고급 양주를 먹었습니다. 부하에게 총을 맞아 죽었던 그곳도 바로 그런 자리였어요. 너는 그런 거짓말을 믿는 거냐. 그건 빨갱이들이나 하는 말이지. 박정희 대통령은 공산주의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셨어! 그분이 아니었으면 나와 너, 우리 가족 모두 김일성 치하에서 피를 토하며 살았을 거야. 각하도 사람이니 위로가 필요하고 밤이면 적적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겠지. 사람은 누구나 어두운 구석도 품고 사는 법이다.

아버지, 박정희는 한때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투사를 죽이는 친일 군인이었고, 해방 뒤에는 남로당에 가입했다가 체포돼 동료들을 배신하고 자기만 살아남았지요. 그런 자격지심 때문에 반공주의에 더 집착했다고 해요. 쿠데타를 일으키고 20년 가까이 장기집권을 하면서 죄 없는 많은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죽이고 가뒀어요. 그때 희생당한 많은 분들이 이제야 다시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있어요. 너는 공산당이 얼마나 악독한 놈들인지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에 더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 있었어. 조국이 혼란스럽고 북괴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군인이 뭘 해야겠니. 나라를 지켜야지! 5·16 군사혁명이 아니었으면 우리나라는 벌써 망했어. 빨갱이들 떠드는 말에 속지 말거라. 그놈들은 입만 살아 있는 시뻘건 놈들이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애국심이 없다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김일성에게 갖다 바치려는 놈들이야. 그걸 알아야 해. 광주사태 때 김일성이 땅을 치고 후회했다더라. 그때 밀고 내려갔어야 했는데, 그러면서. 광주사태도 다 빨갱이들이 선동해서 난리가 난 것 아니냐. 전두환이 밉살맞은 구석은 있어도, 그때 잘했지. 나라를 구한 거니까. 군인은 언제든 나라가 어려울 때 들고일어날 줄 알아야 해.

나와 아버지의 대화는 이렇게 맴돌다 미끄러진다. 나는 아버지의 완고함 앞에서 서성댄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대꾸에 지친다. 아버지의 삶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쓴, 거친 삶이었다. 살기 위해 뭐든 해온 삶이었다. 그가 버텨낸 고난은 사회적 고난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가슴에선 국가적 고난의 개인화와 개인적 고난의 국가화가 경쟁한다. 가난과 온갖 풍상을 극복한 아버지의 떳떳한 삶은, 전쟁의 참화와 공산주의 침략을 극복하고 선진국 대열에 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와 같다. 아버지의 삶은 대한민국의 역사고, 삶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조국에 대한 사랑, 애국이 된다.

애국이 천대받는 세상에서 애국자들은 ‘박정희의 심정으로’ 거리로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애국의 길’ 위에서 나는 군복 입은 아버지를 만나고, 태극기를 흔드는 어머니를 만나고, 성조기를 든 삼촌과 이모를 만난다. 드물게 사촌 형제와 조카를 만난다. 외국보다 낯선 애국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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